경제사 이야기

(14) 10억원짜리 중세시대'슈퍼카'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과시와 낭비가 미덕이었던 '중세시대 기사'…기사가 되려면 10억원대 여유 자금 있어야
중세시대 기사 한 사람을 부양하는 비용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11세기 말에는 기사가 타는 말 한 마리 가격이 황소 5~10마리 가격과 맞먹었다고 한다. 기사들이 입는 갑옷은 그런 말보다도 훨씬 비싼 럭셔리 제품이었다. 말을 탄 기사는 한마디로 값비싼 이동 요새 같은 존재였다. 비유적 표현일 수도 있지만, 구식 가죽갑옷을 대신해 등장한 사슬(미늘) 갑옷은 말보다 네 배에서 열 배나 비싼 것으로 전해진다. 즉 갑옷 한 벌 가격이 황소 20~100마리에 해당했다. 기사 한 명당 말 세 마리 필요문제는 기사가 된 뒤, 기사 생활을 유지하려면 말이 한 마리만으로는 부족했다는 데 있다. 긴 행군을 하고 나면 말이 지쳐서 막상 전장에 투입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100년 플랑드르 백작이 500명의 기사를 소집했을 때 기사 한 명당 말 세 마리를 보유하도록 주문했다. 말이 세 마리 필요했던 것은 행군마와 전투마, 짐말이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만 기사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사 한 명을 부양하기 위해 드는 비용을 오늘날 수준으로 단순 비교해보자면, 소 한 마리를 500만원이라고 가정할 경우 싸게는 1억7500만원(황소 5마리×3+갑옷(황소 20마리))에서부터 6억5000만원(황소 10마리×3+갑옷(황소 100마리))에 이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1000년 전 중세시대 소의 가치가 오늘날보다 훨씬 컸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사로 출사하기 위해서 5억~10억원가량의 여유자금을 굴릴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했다.

여기에 당시엔 희귀 품목이던 창이나 칼(아서왕의 엑스칼리버 같은 명검의 전설은 그만큼 칼이 귀했던 영향도 있다) 같은 무기류에서부터 종자를 부리고, 먹일 돈도 별도로 포함돼야 한다. 기사로 성장하는 데 교육 기간도 오래 걸린 만큼 십수 년의 교육비용도 고려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번주의 승자가 다음주의 희생자가 될지 모른다”는 표현처럼 언제 어디서 기사가 전사하거나 생포돼 몸값을 지불해야 할지 모르는 리스크도 컸다. 물론 보험은 존재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세의 기사 문화는 용기와 무술의 숙련도뿐 아니라 과시와 낭비가 기사의 미덕으로 칭송되면서 수입이 적은 때라도 지출이 적은 경우는 드물었다. 기사들은 항시 자신의 부를 마구 쓰면서 ‘관대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각종 축연과 술자리, 전장 획득물 분배 등은 당시 기사 생활양식의 일부였다. 저명한 중세사가 조르주 뒤비는 “기사계급이 당대 사회에 보여준 경제적 모습은 전투에 의한 약탈과 관습적 소비”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150㏊(헥타르) 이상 토지 소유해야 기사 한 명 거느려요약해보자면 150㏊ 이하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늘 전투 준비가 되어 있는 기사 한 사람을 지속적으로 부양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론한다. 중세시대 기사의 값어치가 오늘날 포르쉐, 람보르기니, 마이바흐 같은 초특급 럭셔리 슈퍼카에 비유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자연스레 전장에서 전사한 기사들의 갑옷과 장비는 약탈의 대상이 되곤 했고, 전쟁 도중 부상당한 기사는 럭셔리 무구를 노린 보병이나 시중꾼들에게 잔인한 방식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중세판 ‘슈퍼카’를 유지하는 것은 그만큼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던 셈이다.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한걸음 더 - 기사도기사(騎士)는 중세시대 유럽에서 기마로 싸우는 전사 계층이다. 기사는 분류상 귀족이지만 귀족 중에는 최하급 귀족에 속했다. 봉건제는 영주가 가신에게 봉토(封土)를 주고 군사적 충성을 약속받는 형태인데, 국왕→귀족→기사 순으로 봉토와 충성을 주고받는 다층적 관계가 형성됐다. 기사가 되려면 7살부터 기사 훈련을 받아야 하며 14살이 되면 무기를 옮기는 등 심부름을 하게 됐고 20살이 되면 기사 직위를 얻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나갔다. 기사들에게 봉토를 주고 보통 매년 40일 동안 군역의무를 지게 했는데, 영토를 지키고 봉사의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11세기 무렵 교회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십자군전쟁이 벌어지면서 성전(聖殿)기사단 등 기사단이 조직되었고, 교회를 존경하고 영주와 군대의 상관에게 충성하며 자기 명예를 지키는 ‘기사도(騎士道· chivalry)’ 정신이 유행했다. 용맹하되 관용을 베풀어야하고 여자 등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도덕규범이다.

십자군전쟁이나 영국과 프랑스 간 백년전쟁 등 장기간 전쟁이 벌어지면서 봉건제가 점차 붕괴되고, 대포의 발달 등 전쟁의 양상이 바뀌면서 14~15세기 기사제도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16세기에 기사는 국왕이 수여하는 명예 지위 수준으로 전락했지만 기사도는 명예와 예절을 중시하고 여성을 존중하는 ‘젠틀맨십’으로 현재도 지켜지고 있다. NIE 포인트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과시와 낭비가 미덕이었던 '중세시대 기사'…기사가 되려면 10억원대 여유 자금 있어야
① 고대에서 중세시대로 넘어오면서 봉건제가 발달한 이유는 왜일까.

② 보병 위주의 전투에서 기병 위주의 전투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③ 현대에서도 일부 유럽 국가에서 큰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기사 작위를 부여하는 이유는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