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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720호 2021년 8월 30일

경제사 이야기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화폐가 등장할 때부터 끊임없이 반복됐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표현은 널리 알려진 문구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 아닐까 싶다. 일상생활에서 ‘구축’이라는 단어는 “진지를 구축(構築)한다”는 식으로 주로 쓰이기 때문이다. ‘어떤 세력 따위를 몰아서 쫓아냄’이란 뜻을 지닌 ‘구축(驅逐)’이라는 낱말은 이젠 사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법하다. ‘악화’나 ‘양화’란 단어도 쉰내를 폴폴 풍기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6년간 취해진 ‘양적 완화’ 처방도 따지고 보면 돈의 가치를 떨어뜨려 빚 부담을 줄이는 것이니 어쩌면 오늘날도 악화가 양화를 계속 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 저명한 경제사학자인 갤브레이스는 “역사상 단 한 번도 도전받지 않은 경제법칙”으로 나쁜 돈이 좋은 돈을 쫓아버린다는 소위 ‘그레셤의 법칙’을 꼽기도 했다.
금속화폐의 무게와 순도 조작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은 금속화폐가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시작됐다. 금속화폐는 처음에 오늘날 금괴와 비슷한 막대형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고대 로마 시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고대 로마인들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시대까지 주화를 가지지 않았고 필요한 것을 구매하기 위해선 각인되지 않은 구리덩어리를 썼다”는 ‘전설’을 전했다. 문제는 매번 거래할 때마다 무게와 금, 은의 순도를 확인해야 했다는 점이다. 그런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막대 표면에 무게와 순도를 확인하는 인장을 찍었다. 하지만 인장은 위조하기 쉬웠고, 막대의 일부를 잘라내도 표시가 나지 않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주화(금속화폐)였다. 최초의 금화와 은화는 기원전 7세기 소아시아의 리디아인이 만들었다. 리디아인은 금화와 은화에 사자머리 문양을 새겼다. 금속화폐에 문양을 찍는 방법은 이웃 나라들로 퍼져나가 아이기나는 거북, 코린트는 날개 달린 말, 아테네는 부엉이를 화폐에 등장시켰다. 페르시아 화폐에는 사자와 황소, 활을 쏘는 궁사 등이 배치됐다. 중국 한나라에선 오수전(五銖錢)을 발행할 때 동전 양면에 윤곽을 넣고 주조했다. 동전을 갈아서 동 가루를 얻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처럼 안전장치를 한 금속화폐도 무게와 순도 조작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았다. 화폐를 만드는 국가조차 이 같은 문제점을 ‘이용’했다. 기원전 6세기경 아테네를 이끌었던 솔론은 화폐를 주조하면서 이익을 챙기는 ‘주조차익(시뇨리지)’ 관례를 최초로 만들었다. 당시 은 1달란트(talent)는 60미나(minae)였고, 1미나는 100드라크마(drachmae)였다. 은 1달란트는 6000드라크마 가치를 가지는 게 원칙이었지만 솔론은 1달란트로 6300드라크마를 주조했다. 주화 제작 첫발부터 은화의 표면가치는 실질가치에 못 미쳤던 것이다.

로마 시대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3세기 이후 로마의 영토 확장이 한계에 이르면서 정복을 통한 전리품 유입이 크게 줄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지출은 변함이 없었다. 대규모 공사와 왕실의 사치를 위한 자금 수요는 끝이 없었다. 또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황제들은 계속 많은 재물을 풀어야 했다. 이미 1세기 중반에 플리니우스는 해마다 2500만 데나리우스가 넘는 돈이 중국, 인도, 아라비아의 사치품을 사는 데 쓰였다고 기술했다.

로마 황제들이 택한 방법은 재원 확보를 위해 은화 속 은 함량을 줄여나간 것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금화(아우레우스)와 은화(데나리우스), 동화(세스테리우스) 등 3개 금속에 바탕을 둔 화폐 체계를 갖췄지만 주화의 기준은 은화인 데나리우스였다. 문제는 주화의 액면 가치는 그대로 둔 채 크기와 함량을 줄이는 ‘장난’을 쳐서 같은 양의 금속으로 더 많은 화폐를 찍어냈다는 점이다. 이 방법은 돈이 필요할 때 세금을 올리는 것보다 시민들의 저항도 훨씬 적었다. 하지만 그 결과 화폐가치 하락이 꾸준히 발생했다. 네로 황제는 아예 도금된 화폐를 만들어 재원을 충당하기도 했다. 로마 데나리우스 은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해외에선 은 함량이 높은 특정 은화만 요구하게 됐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순도가 높은 은화를 시장에 풀지 않고 품 안에 모셨다. 시장에 유통되는 것은 모두 순도가 낮은 불량 화폐뿐이었다.

54년 은 함유량이 100%에 가까웠던 로마의 은화는 68년 은 함량이 90%로 줄었고, 211년엔 50%로 떨어졌다. 260년 갈리에누스 황제가 집권했을 때 은 함유량은 60%였지만 불과 8년간의 집권이 끝난 뒤인 268년에는 원래 중량의 4%밖에 안되는 은이 섞였다. 결국 로마제국 말기에 가면 데나리우스를 대체하는 라디에이트가 도입되지만 라디에이트의 액면가는 데나리우스의 두 배이면서도 은화에 함유된 은은 2%에 불과하고 98%는 동이었다. 296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중량 100% 은화를 새로 주조하며 화폐가치 안정을 꾀했지만 너무 늦었다.
위조화폐마저 흔했던 중세시대
화폐가치 하락의 법칙은 중세시대에도 계속 관철됐다. 로마제국 멸망 후 도시가 활기를 잃고, 교역이 위축되면서 화폐 자체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사례까지 나왔다. 브리튼 섬에선 로마군이 물러난 뒤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화폐 사용이 전면 중단됐었다. 유럽 전역을 아우르던 로마라는 권력이 사라진 뒤 화폐 발행과 유통을 강제할 주체가 없어진 탓이었다. 지역별 봉건 제후들의 권력이 커지면서 화폐 주조권은 더욱 분열됐고, 화폐가치는 계속 급락했다. 지방의 봉건영주들이 주조한 잡다한 화폐들이 뒤섞여 유통됐다. 중세시대가 ‘위조의 시대’였던 만큼 위조화폐도 흔했다.

화폐의 공급뿐 아니라 수요도 위축됐다. 농민들은 자급자족의 경제생활을 했고, 장원제 아래에서 농지 사용료는 화폐가 아니라 수확물과 노동 같은 현물로 지급됐다. 화폐를 거래할 일이 사라지면서 금화는 시장에서 유통되기는커녕 목걸이나 기념품으로 사용됐다. 금 비축량이 적어 계속 금화를 찍어낼 수도 없었다. 동로마제국에서 보상금 형태로 유입되던 솔리두스 금화의 유입도 곧 중단됐다. 금화는 솔리두스 가치의 3분의 1 수준인 트레미시스 같은 작은 단위로 쪼개지다가 사라져버렸다. 일부 은화만 겨우 명맥을 유지했고. 금화는 9세기 이후엔 주조가 중지됐다. 은화에 비해 가치가 과소평가됐던 금화는 유통되지 못한 채 금고 속에 보관되거나 녹여져 금괴로 바뀌어 은화를 사는 용도로 팔려나갔다.

얼마 유통되지 않던 화폐마저 가치 하락과 재주조가 반복됐다. 가장 큰 이유는 일반인들의 위조(counterfeit)와 테두리 깎기(clipping) 때문이었다. 가죽가방 안에 동전을 넣고 흔들어 떨어지는 가루를 모으는 ‘땀내기(sweating)’ 방법도 있었다. 은행업자나 금 세공업자들은 금은의 순도가 높은 양화는 자신이 보유하고 순도가 떨어지는 악화만 거래에 사용했다. 화폐 훼손에 대처해 나타난 궁극적인 처방은 1663년 영국에서 처음 채택된, 주화 둘레에 오돌토돌한 톱니 모양을 새기는 것이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후대 인물인, 엘리자베스 1세 때 왕실 재정고문이었던 토머스 그레셤(1533~603)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고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NIE 포인트
① 화폐를 ‘금속에 새긴 신뢰’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왜일까.

② 금이나 은을 기본으로 하는 금본위제, 은본위제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③ 묵은쌀이 햅쌀로 둔갑해 팔리거나 가짜뉴스가 범람해 정통 미디어가 경영 어려움을 겪는 사례, 막말정치가 판치는 것 등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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