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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676호 2020년 9월 21일

경제사 이야기

세계의 일꾼이었던 중국인 ''쿨리''…그들은 19세기 경제지도를 바꿨다


1872년 7월 9일, 일본 요코하마항에 페루 선적의 마리아루즈호가 기항했다. 마카오를 출발해 페루로 가던 중 폭풍을 만나 수리를 위해 입항한 것이다. 이튿날 밤, 이 배에서 남자 한 명이 몰래 뛰어내려 옆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으로 옮겨갔다.

영국 해군은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일본 관리에게 넘겼다. 일본 정부는 타국 상선에 간섭할 수 없다며 그를 마리아루즈호 선장에게 인계했다. 뒤이어 또 다른 남자가 탈출해 영국 군함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배에서 엄청난 학대를 당했다고 호소했다. 급기야 영국 공사가 군대를 이끌고 마리아루즈호를 조사했다. 이 배에 실린 화물은 다름 아닌 232명의 청나라인이었다. 그들은 페루의 농장과 계약을 맺고 일하러 가던 저임금 노동자였다. 노예와 다름없던 ‘쿨리’의 참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라가 쇠하면 국민이 고생
쿨리는 ‘머슴, 일꾼’을 뜻하는 인도 힌디어의 ‘kuli’에서 유래했다. 영어로 ‘coolie’인데, 해외에서 일하는 저임금 계약노동자를 가리킨다. 쿨리는 19세기 후반 중국인이 겪은 고통의 상징과도 같다.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이었던 청나라 황실은 자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다. 나라가 쇠하면 국민이 온갖 고초를 겪기 마련이다. 쿨리가 그런 경우였다.

청나라는 2차 아편전쟁(1857~1858년)에서 패한 뒤 중국인 노동자의 해외 송출을 공식 허용했다.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요구 사항이었다. 쿨리는 주로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다. 19세기 들어 중국 인구가 급증했는데 경작지는 잦은 가뭄으로 되레 줄었다. 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이 돈벌이를 하러 해외로 나갔다. 지금도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중국 화교와 차이나타운이 있는데 이런 아픈 역사가 숨어 있다.
쿨리 ‘세계의 일꾼’으로 부상하다
최초의 중국인 쿨리는 1806년 영국 식민지 트리니다드로 보내졌다. 쿨리가 본격 송출된 것은 1820년대 이후다. 1848년에 호주, 1849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도 쿨리를 수입했다. 이들은 형식상으로는 노예가 아니라 계약노동자였다. 쿨리는 대개 문맹이어서 불리한 조건의 계약서에 내용도 모르고 서명했다. 노예 수송선으로 쓰였던 열악한 배에 실려 몇 달씩 항해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고, 고용주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 계약 해지도 불가능했고 일을 게을리해도 처벌받았다.

쿨리는 19세기 초 유럽 국가들의 노예 해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국은 본국의 면직물과 럼주, 서인도제도의 설탕, 아프리카의 노예를 교환하는 삼각무역으로 큰 이득을 올렸지만 인간을 사고판다는 도덕적 비난에 직면했다. 급기야 영국 정부는 1807년 노예 수입을 금지했고, 프랑스 네덜란드 등 다른 유럽 국가도 뒤따랐다. 그러자 유럽 각국이 신대륙에 벌여 놓은 설탕 면화 등 플랜테이션과 금광 은광 등 광산에서는 당장 일손이 부족해져 아우성이었다. 1863년에는 미국에서도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으로 철도 건설과 농장에 필요한 노동력 부족이 심각한 고민이었다. 이때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중국을 비롯해 인도 동남아시아 등지의 저임금 노동자였다. 특히 중국인은 인내심이 강하고 성실해 각지에서 일꾼으로 선호했다.
미국 횡단철도 놓으며 쿨리 4분의 1 죽어
19세기 후반 들어 쿨리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미국에서 쿨리의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쿨리는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등의 건설 현장에 투입돼 숱하게 목숨을 잃었다.

미국의 대륙횡단철도 착공(1865년)도 쿨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서부의 철도 공사 중 최악의 난코스였던 시에라네바다산맥에 쿨리가 투입됐다. 이 공사에 투입된 쿨리 1만2000명 가운데 4분의 1인 3000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쿨리가 뚫은 대륙횡단철도는 미국의 경제 지형을 바꿔놓았다. 미시시피강 서쪽은 사실상 불모지였지만 철도시대가 열리며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기차역을 거점으로 도시가 생겨나 오늘날 미국의 원형이 갖춰졌다.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 철도왕 코닐리어스 밴더빌트와 릴런드 스탠퍼드 등이 큰돈을 벌게 된 것도 대륙횡단철도 덕이었다. 철산업이 번성하자 석유, 자동차산업도 일어나 미국은 산업혁명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 점에서 쿨리의 후예인 중국 화교는 ‘미국의 오늘’에 일정 지분이 있다. 하지만 쿨리의 삶은 차별과 박해의 연속이었다. 미국 의회는 1882년 ‘중국인배척법’을 제정해 쿨리의 노동이민을 금지했다. 비교적 공정하다는 미국 법정에서조차 중국인은 법적 보호도 정당방위도 허용받지 못했다. 심지어 백인들이 중국인 마을로 쳐들어가 죽여도 처벌하지 않았다. 멕시코로 건너간 쿨리들은 멕시코혁명 때 대거 학살당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영어로 ‘기회가 전혀 없다’라는 의미로 “He doesn’t have a Chinaman’s chance”라는 관용 표현이 생겨났을 정도다. 오직 중국인만을 표적으로 한 이 법은 2차 세계대전 때 중국이 일본과 싸우며 미국의 우방이 된 이후인 1943년에야 폐지됐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NIE 포인트
① 전 세계 5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중국 출신 해외 이주자들이 저임금 노동자로 해당 국가 경제에 기여한 부분은 어느 정도일까.

② 1902년부터 미국 하와이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 멕시코 선인장 농장 노동자로 이주한 한인들과 그 후손을 우리가 기억하고 보듬어야 할까.

③ 오늘날 주요 국가들이 할당제 등으로 일정 인원만 입국을 허용하는 등 저임금 해외 이주 노동자의 무분별한 유입을 막는 이유는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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