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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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세계의 일꾼이었던 중국인 '쿨리'…그들은 19세기 경제지도를 바꿨다
1872년 7월 9일, 일본 요코하마항에 페루 선적의 마리아루즈호가 기항했다. 마카오를 출발해 페루로 가던 중 폭풍을 만나 수리를 위해 입항한 것이다. 이튿날 밤, 이 배에서 남자 한 명이 몰래 뛰어내려 옆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으로 옮겨갔다.영국 해군은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일본 관리에게 넘겼다. 일본 정부는 타국 상선에 간섭할 수 없다며 그를 마리아루즈호 선장에게 인계했다. 뒤이어 또 다른 남자가 탈출해 영국 군함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배에서 엄청난 학대를 당했다고 호소했다. 급기야 영국 공사가 군대를 이끌고 마리아루즈호를 조사했다. 이 배에 실린 화물은 다름 아닌 232명의 청나라인이었다. 그들은 페루의 농장과 계약을 맺고 일하러 가던 저임금 노동자였다. 노예와 다름없던 ‘쿨리’의 참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라가 쇠하면 국민이 고생쿨리는 ‘머슴, 일꾼’을 뜻하는 인도 힌디어의 ‘kuli’에서 유래했다. 영어로 ‘coolie’인데, 해외에서 일하는 저임금 계약노동자를 가리킨다. 쿨리는 19세기 후반 중국인이 겪은 고통의 상징과도 같다.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이었던 청나라 황실은 자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다. 나라가 쇠하면 국민이 온갖 고초를 겪기 마련이다. 쿨리가 그런 경우였다.청나라는 2차 아편전쟁(1857~1858년)에서 패한 뒤 중국인 노동자의 해외 송출을 공식 허용했다.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요구 사항이었다. 쿨리는 주로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다. 19세기 들어 중국 인구가 급증했는데 경작지는 잦은 가뭄으로 되레 줄었다. 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이 돈벌이를 하러 해외로 나갔다. 지금도 세계 어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