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바로가기

생글생글 674호 2020년 9월 7일

경제사 이야기

14세기 유럽을 휩쓸고 간 페스트…동서 교역로를 통해 공포가 퍼져나갔다

《데카메론》은 14세기 중반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던 시기에 탄생했다. 1346년 흑해 크림반도 카파에서 시작된 페스트는 불과 5~6년 만에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보카치오는 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데카메론》 첫머리에 ‘1348년 3~7월의 5개월간 피렌체에서만 인구의 절반이 넘는 10만 명이 죽어나갔다’고 다소 과장해 썼다.

페스트는 본래 중국의 오지, 중앙아시아 등의 풍토병이었다. 페스트균을 지닌 검은 쥐에 기생하는 쥐벼룩을 매개로 전염된다. 14세기 중반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는 1330년대 초, 중국에서 돌기 시작해 서쪽으로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페스트가 발생한 중국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줄어들 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이는 몽골이 지배한 원나라가 몰락한 요인 중 하나다.
동서 교역로로 전파된 페스트
당시 유럽에서는 페스트로 3~4명 중 1명꼴로 목숨을 잃었다. 전쟁보다 훨씬 높은 사망률이다. ‘걸리면 죽는다’는 공포심이 수많은 괴담을 생산했다. 대표적인 것이 페스트가 몽골의 생화학 무기였다는 속설이다. 몽골계 킵차크한국 군대가 1347년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카파를 공격할 때, 페스트 환자의 시신을 투석기로 성안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 흑해 연안 일대에는 이미 페스트가 퍼져 있었고, 카파도 그 영향 아래 있었다. 다만 카파에 있던 상인들이 각 나라로 귀국하면서 더 빨리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대역병이 유럽을 순식간에 집어삼킨 데는 그럴 만한 조건이 구비돼 있었기 때문이다. 세균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페스트가 유행한 원인을 농업과 도시화, 교역 활성화에서 찾았다. 10~14세기 유럽은 농업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구가 대폭 늘었다. 12~13세기에 십자군전쟁을 거치며 로마시대 도로들도 빠르게 복원됐다. 476년에 서로마제국 붕괴 이후 위축됐던 상업 도시들이 되살아나면서 교역이 활발해졌다.

전염병의 매개체가 될 사람들이 모여 살고, 왕래가 빈번한 환경은 세균 번식에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위생 관념이 엉망이었다. 오염된 식수, 부실한 하수 처리, 개념조차 없던 개인 위생은 세균이 배양될 수 있는 온실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통한 동서 교역이 되살아나면서 페스트 전파의 충분조건이 만들어졌다. 카라반의 낙타 짐, 동방무역 상선의 화물에 묻어 들어온 페스트균은 상품이 이동하는 곳이면 어디든 번져나갔다. 제노바 피렌체 베네치아 등 상업도시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퍼지는 데 불과 5~6년도 안 걸렸다.
창문 밖으로 머리 내밀어 확인한 초기 검역
대역병은 관습과 제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중세 유럽인들은 원인도 모르고, 아무 약도 듣지 않는 페스트를 ‘신의 재앙’ ‘신의 분노’로 여겼다. 페스트 환자는 신이 징벌을 내렸다고 판단해 그대로 방치했다. 《데카메론》에는 생존할 수 있었던 사람들까지 그대로 방치해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기록됐다.

또한 병이 낫게 해 달라고 오로지 기도만 하거나 회개의 눈물로 고약을 만들어 바르는 사람도 있었다. 스스로 채찍질하는 고행과 성지순례도 유행했다. 어느 곳에서는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며 그들을 학살했고 이방인 거지 나병 환자를 공격하기도 했다. 당시 의사는 호흡을 통한 감염을 우려해 새 부리 모양의 기묘한 가면을 쓰고 환자를 진료했다.

유럽 인구 7500만 명 중 2000만~2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는 결국 경제 질서와 중세적 세계관의 몰락을 앞당겼다. 영주는 페스트로 농노가 줄면서 지배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도시도 농촌도 노동력이 태부족이어서 임금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집단생활을 하는 수도원 성직자의 사망률도 높았다. 교회는 성직자도 잃고, 교인도 잃어 세력과 권위가 약화됐다. 《데카메론》의 신사 숙녀들은 교외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불결한 주거 환경에서 살아가는 빈민들은 전염병이 휩쓴 도시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페스트와 싸우면서 위생을 위한 행정과 검역도 생겨났다. 페스트 전염을 막으려면 환자 파악과 격리가 필수다. 관리들은 환자와 그 가족을 집에 가둔 채 문을 잠갔다. 매일 아침 페스트로 격리된 지역에 가서 환자에게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게 했다. 머리를 내밀지 않으면 죽은 것으로 간주했다. 페스트는 1664~1666년 영국 런던을 강타한 ‘런던 대역병’으로 재연됐다. 이때도 온몸이 까맣게 변한 시신이 즐비했지만, 큰 구덩이에 묻는 것 외에는 아무 대책이 없었다. 민간 요법으로 소변 목욕이 등장했고, 고양이가 병을 옮긴다고 해서 고양이 도살 사태도 벌어졌다. 하지만 고양이가 사라지자 쥐가 번식해 페스트가 더욱 기승을 부려 6만8000명이 죽었다.

그러다 1666년 런던 대화재가 일어난 뒤 페스트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화재가 빈민가의 불결한 목조 가옥을 모두 태워 의도하지 않게 쥐를 박멸한 덕이었다. 이후 런던에서는 벽돌 주택만 허용했고 최초의 화재보험이 등장했다.


300년간 유럽을 뒤흔든 페스트는 런던 대화재 이후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1855년 아시아에서 재발해 중국 광둥성, 홍콩 등지로 퍼지기도 했지만, 과거와 같은 대유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19세기 말, 파스퇴르가 페스트의 발병 원인과 치료법을 발견하면서 기나긴 흑사병의 공포도 사라졌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NIE 포인트
① 14세기 초 중국의 오지, 중앙아시아의 풍토병이었던 페스트가 14세기 중반 유럽을 순식간에 집어 삼킨 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② 중세시대 대역병에 따른 큰 인명 피해로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당시 유럽의 경제질서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③ 유럽에서 기승을 부리던 페스트가 17세기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춘 데는 어떤 사건이 있었을까.
글 소개
‘보이는 경제 세계사’ 시리즈는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의 저서에서 주요 내용을 새로 정리한 것이다. ‘사색은 없고 검색만 있는’ 시대에 경제라는 프리즘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경제사의 결정적 장면들을 전달한다.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온라인신문협회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