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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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군사력 바탕으로 한·중·일 항로 독점한 장보고…범신라인 네트워크로 무역의 시대를 이끌었다
국제관계의 혼란스러운 재편 속 한국은 어떻게 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문제는 사람과 정책이다. 우리가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조상이 간 ‘길(道)’을 바라보면서 미래의 길을 찾아야 한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지금, 과거 동아시아 세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신라의 장군이자 무역상인 장보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보고는 누구인가9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에는 평화의 시대, 경제의 시대, 무역의 시대가 도래했다. 아라비아까지 이어지는 해양 실크로드, 동로마까지 연결된 사막 실크로드와 초원 로드는 동아지중해 무역망과 긴밀해지는 중이었다. 장보고는 이 같은 국제정세 변화 속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찾아내 적응하는 데 성공했다. 천성과 특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거시적인 안목과 경륜을 갖춰 국제질서 변화와 신라의 내부상황을 간파하는 능력을 발휘했다.장보고는 790년경 섬(海島)에서 태어나 841년에 암살당한 인물이다. 《삼국사기》에 등장한 장보고는 짧고 냉소적으로 기술돼 있다. “장보고와 정년은 신라 사람이다. 그들의 고향과 조상(父祖)은 알 수 없다.”는 내용과 함께 “청해진의 궁복은 왕이 자기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자 원망하면서 청해진에 머물면서 모반했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그런데 《신당서》와 그 시대 최고의 문장가인 두목이 묘사한 장보고는 전혀 다르다. 장보고와 정년은 싸움을 잘 했고, 특히 장보고가 용맹했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에서는 ‘장보고(張保皐)’를 보배롭고 고귀하다는 의미의 ‘장보고(張寶高)’라고 남기기도 했다. 천태종의 좌주였던 엔닌(圓仁)은 장보고에 편지를 보내 흠모하고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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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범신라인들이 구축한 해안경제 벨트·동아시아 물류망, 경제특구·일대일로 등 중국 개방경제의 '모범'이었다
8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동아지중해 세계는 본격적으로 평화의 시대, 상업의 시대, 무역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대에 당나라는 국제화와 개방을 추진해 신라인과 발해인 외에도 중앙아시아인, 페르시아인, 동남아시아인들이 수도인 장안(시안), 양저우, 광저우 등의 대도시에 집단으로 거주했다. 또한 무역을 중요시해서 오아시스 실크로드와 해양 실크로드를 활용한 동서무역이 활발했다. 본국 신라인들과 동아시아 지역에 거주한 고구려·백제 유민 및 신라인으로 구성된 재당(在唐) 신라인, 일본에 사는 재일 신라인 등은 ‘범신라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라시아 물류망에 적극 참여했다. 신라와 일본을 당나라 중심의 유라시아 물류망 속에 편입시키는 일을 범신라인 상인들이 했다. 각 해역과 항로에 익숙한 범신라인들은 남해항로, 동해남부 항로까지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동아지중해 유통망을 확장하고 활성화시켰다. 신라인들의 뛰어난 조선술신라인들은 조선술도 뛰어났다. 752년 신라가 일본에 파견한 김태렴이 이끄는 사신단은 700명의 인원이 7척의 배로 갔다. 평균 1척당 100명이 승선한 셈이다. 839년의 기록에는 ‘신라선이 풍파에 강하다’고 했고, 840년의 기록을 보면 대재부가 신라배를 6척이나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상인이나 승려 등 민간인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신단조차도 신라배를 활용한 적이 있다. 이 무렵에 일본 승려들이 타고 온 신라배가 교토부 히에이산의 명덕원에 그림으로 남아있다. 쌍 돛대에 활대가 9개, 사각돛과 누각이 있고, 물레를 이용하여 닻을 조정했다. 일본의 견당선들은 4척 정도가 1개 선단을 이뤘는데, 1척당 약 100명에서 150명 남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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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당나라에 자리잡은 신라인과 고구려·백제 유민들…뛰어난 항해술로 운하경제와 해양무역서 맹활약
중국은 한때 빈국이었으나 1980년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선택한 후 비약적으로 발전해 미국과 갈등을 벌이는 중이다. 중국의 성공에 기여한 화상(華商)들과 중화 경제권은 8~9세기 동아지중해의 ‘범신라인 공동체’와 흡사했다. 또한 덩샤오핑이 추진한 경제특구 전략은 신라방, 파사방을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윤명철, 《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범신라인들의 구성'범신라인 공동체'는 본국 신라인들과 동아시아 지역에 거주한 재당 신라인, 재일 신라인들의 네트워킹 시스템이다. 현재 ‘한민족 공동체’와 ‘한상 연합회’가 섞인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그중 핵심 역할을 담당한 집단은 당나라에 거주하는 ‘재당신라인’(在唐新羅人)들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재당신라인들은 고구려·백제 유민과 신라인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수적으로 가장 많은 고구려 유민들은 이정기(李正己)일가가 다스린 제나라에 살다가 제가 멸망한 후 ‘신라인’이라는 이름으로 변했다. 백제계 유민들은 전라도 해안 일대에서 임시정부를 따라 일본열도로 탈출했다. 충청도와 경기도 해안지방에서는 황해중부 횡단항로를 이용해 산둥성과 장쑤성 해안에 도착한 후 고구려 유민들과 합세했다. 816년에는 농민들 170여명이 저장성 지역으로 건너왔다. 이 같은 ‘보트피플’들과 승려, 유학생, 심지어는 노예로 팔려온 신라인들은 함께 신라촌을 이루고 살았다. 일종의 ‘신라타운’인 셈이다. 그리고 점차 ‘재당신라인(在唐新羅人)’이라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운하경제와 해양무역에 참여한 재당신라인재당신라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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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삼국통일 전쟁의 후유증…일본과 적대관계, 잦은 해적 약탈에도 신라·日 무역 꾸준히 증가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켰고, 668년에는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당나라의 편을 들었다. 661년부터 신라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와 갈등을 빚다가 8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676년에 불완전하지만 자체의 통일을 이룩했다. 하지만 7세기 후반에 신라는 내부적으로 위기를 극복해야만 했고, 재편된 신국제질서 속에서 자기 위상을 적립해야하는 과제가 있었다. 고구려가 부활한 북국인 발해와는 군사적인 긴장상태에 있었고, 새로 탄생한 일본국과는 충돌을 그치지 않았다.동아시아 세계는 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후 질서가 안정되고, 외교와 무역 문화를 주고받는 열전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신라는 서해와 동중국, 남해를 이용할 수 있는 물류망의 허브였다. 당나라의 상품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일본의 토산품과 공산품들을 당나라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해야 했다. 일본에 시장을 개척하고, 수출망을 확장해야만 했다. 신라는 668년부터 779년까지 일본에 사신단을 47회나 파견했다. 일본의 신라정토론통일을 외세에 의존한 신라는 일본과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 감정적으로 우호적일 수가 없었다. 초기부터 갈등관계가 있었지만, 결국 8세기 중반 무렵에는 국교가 단절됐다.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도 고조됐다.일본은 소위 ‘신라정토론’으로 알려진 정책을 추진했다. 내부적으로는 신라를 적으로 삼아 국가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왕권을 강화시켰다. 실세인 친백제계 후지와라(등원) 일가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목적 뿐 아니라 실제로 신라를 공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759년 9월에는 전국에 명을 내려 배 500척을 3년 안에 건조하도록 할당을 했다. 760년 4월에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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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동아시아 무역의 시대 '물류 허브'였던 신라…서·중앙아시아 잇는 실크로드 출발·종착점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켰고, 668년에는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당나라 편을 들었다. 661년부터 신라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와 갈등을 빚다가 전쟁을 시작했다. 신라는 국력이나 전력을 비교하면 약세였지만 화랑정신 등으로 다져진 특유의 용기와 자주의식을 갖고, 복국전쟁을 벌이던 고구려 유민, 백제 유민을 포섭해 민족전쟁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토번(티베트)의 계속되는 공격과 아랍세력인 압바스 왕조의 중앙아시아 진출, 실크로드 지역과 투르크 등 북방 지역의 동요 등 유라시아 세계의 역학관계와 혼란을 겪는 당나라의 내부 사정을 활용했다. 그리고 당나라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결국은 8년 전쟁에서 승리하며 676년에 불완전하지만 자체의 통일을 이룩했다.하지만 7세기 후반에 신라는 내부적으로 위기를 극복해야만 했고, 재편된 신국제질서 속에서 자기 위상을 적립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고구려가 부활한 북국인 발해와는 군사적인 긴장 상태에 있었고, 새로 탄생한 일본국과는 충돌을 그치지 않았다. 내부에서도 토지의 황폐화, 인명의 손실, 군수산업 약화로 인한 산업구조의 혼란, 고구려·백제 유민 흡수와 처우 문제, 사회 갈등 등 전쟁과 통일의 후유증이 산적했다. 그 가운데 국부를 창출시키는 정책이 근본적이었다. 산업을 발전시키고,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일이었다. 동아시아 세계의 안정과 무역의 시대동아시아 세계는 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후 질서가 안정되고, 국가들 간 충돌도 줄어들었다. 이제 정치와 군사가 주도하는 냉전질서에서 벗어나 외교와 무역, 문화를 주고받는 열전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당나라는 중앙아시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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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면은 어떻게 세계의 식단으로 자리잡았을까
국수는 누구나 좋아한다. 밥보다 면을 더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이 먹는 짜장면은 하루 150만 그릇으로 추정된다. 또 세계라면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은 라면을 연간 38억 개, 1인당 76개를 먹는다. 연간 소비량은 7위지만, 1인당 소비량은 2위 베트남의 52개를 앞서 단연 1위다. 한국인만 그런 것도 아니다. 면 요리는 아시아와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인의 주요 식단으로 자리잡았다.국수는 한자로 면(麵), 영어는 누들(noodle)이다. ‘noodle’은 독일어로 국수를 뜻하는 누델(nudel)에서 왔다는 설과 라틴어로 매듭을 가리키는 노두스(nodus)가 어원이라는 설이 있다. 로마시대의 유적에서 파스타를 만드는 도구가 발견된 것을 보면 후자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누들로드 위의 밀과 국수국수는 쌀 메밀 등으로 만들지만 주원료는 밀이다. 밀은 BC 7000년께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처음 재배됐다. 이 지역에서 사용한 맷돌이 유물로 남아있다. 밀은 쌀과 달리 6~7겹의 질긴 껍질을 벗기고 빻아 밀가루를 채취하기까지 상당한 기술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반면 기온과 습도가 높은 아시아에서는 밀 대신 쌀을 주로 재배했다. 쌀은 노동집약적이면서 밀보다 산출량이 많아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밀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BC 5000년께 중국으로 전래됐다. 황하유역은 기후가 서늘하고 건조해 밀 재배에 적합했다. 국수도 밀과 함께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서 번성했다. 거꾸로 중국의 국수 문화가 중동과 유럽에 전파됐다는 주장도 있다. 황하 상류의 라지아 지방에서 BC 2000년께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국수의 흔적이 발견돼 중국 기원설의 증거로 제시됐다. 그러나 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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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카라반 교역은 고위험·고수익 벤처사업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양쪽 끝에는 두 개의 거대한 진나라가 있었다. 진시황이 통일한 중국의 진나라와 중국인들이 대진국으로 불렀던 로마제국이다. 대진국은 ‘서쪽의 커다란 진나라’를 가리켰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와 지중해의 패자가 된 로마는 서로 상대방이 뛰어난 문물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사막, 산맥, 협곡, 강, 초원 등 건널 수 없는 지리적 장벽과 호전적인 유목 민족들이 가로막고 있었다.중앙아시아의 방대한 자연 장애물을 넘어 1만㎞ 이상을 걸어서 그 길을 오간 사람들이 바로 카라반이다. 카라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낙타다. 낙타는 등에 혹이 하나인 더운 사막지대의 단봉낙타와 혹이 둘인 아시아 초원지대의 쌍봉낙타가 있다. 단봉낙타는 안장과 같은 하우다를 얹어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실었고, 쌍봉낙타는 짐 싣는 데 주로 이용됐다. 낙타 한 마리가 100~200㎏의 짐을 싣고 하루에 50~60㎞를 갔다.낙타가 가축화된 것은 BC 2500년께다. 인간이 사막지대로 진출하면서 낙타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낙타는 온순하고 수명이 길어 30~40년은 산다. 긴 눈썹과 코 근육으로 눈과 코를 막아 사막의 모래바람을 견딜 수 있다. 또 물과 먹이가 없어도 혹에 저장된 지방을 분해해 오래 버틸 수 있다. 사막에 최적화된 낙타는 카라반에게 컨테이너 트럭과도 같았다. 그러나 낙타로 운반할 수 있는 물품은 한정됐다. 낙타 100마리에 짐을 가득 실어도 비잔티움시대의 배 한 척이 실을 수 있는 짐의 10분의 1도 안 됐다. 카라반의 영화도 15세기 말 대항해시대가 열린 이후에는 자연히 사라졌다. 근대에 들어서자 교역로 곳곳이 두절돼 잊힌 길이 됐다. 점은 선이 되고 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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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14세기 유럽을 휩쓸고 간 페스트…동서 교역로를 통해 공포가 퍼져나갔다
《데카메론》은 14세기 중반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던 시기에 탄생했다. 1346년 흑해 크림반도 카파에서 시작된 페스트는 불과 5~6년 만에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보카치오는 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데카메론》 첫머리에 ‘1348년 3~7월의 5개월간 피렌체에서만 인구의 절반이 넘는 10만 명이 죽어나갔다’고 다소 과장해 썼다.페스트는 본래 중국의 오지, 중앙아시아 등의 풍토병이었다. 페스트균을 지닌 검은 쥐에 기생하는 쥐벼룩을 매개로 전염된다. 14세기 중반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는 1330년대 초, 중국에서 돌기 시작해 서쪽으로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페스트가 발생한 중국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줄어들 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이는 몽골이 지배한 원나라가 몰락한 요인 중 하나다. 동서 교역로로 전파된 페스트당시 유럽에서는 페스트로 3~4명 중 1명꼴로 목숨을 잃었다. 전쟁보다 훨씬 높은 사망률이다. ‘걸리면 죽는다’는 공포심이 수많은 괴담을 생산했다. 대표적인 것이 페스트가 몽골의 생화학 무기였다는 속설이다. 몽골계 킵차크한국 군대가 1347년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카파를 공격할 때, 페스트 환자의 시신을 투석기로 성안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 흑해 연안 일대에는 이미 페스트가 퍼져 있었고, 카파도 그 영향 아래 있었다. 다만 카파에 있던 상인들이 각 나라로 귀국하면서 더 빨리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대역병이 유럽을 순식간에 집어삼킨 데는 그럴 만한 조건이 구비돼 있었기 때문이다. 세균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페스트가 유행한 원인을 농업과 도시화, 교역 활성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