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6) 한반도는 동아지중해 허브
강원 양양군 오산리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고기잡이에 쓰인 동물뼈 낚싯바늘. 연해주에서 일본열도까지 비슷한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강원 양양군 오산리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고기잡이에 쓰인 동물뼈 낚싯바늘. 연해주에서 일본열도까지 비슷한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의식이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의식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언어다. 그 언어의 핵심이 단어다. 지금 한국인들은 진실은 상관없고 오로지 ‘단어’만을 선점하려고 기를 쓴다. 일본이 하던 짓거리들을 배운 탓일까? 그들은 우리에게 ‘반도’라는 단어의 굴레를 씌웠고, 그것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 덫으로 아직 작동하고 있다.

망각된 만주와 해양활동

1995년 여름 북만주와 동몽골의 접경지대 초원으로 올라가 튼튼한 말 세 마리를 샀다. 고구려인들 흉내를 내면서 400년 수도였던 국내성(현 중국 지안시)까지 타고 내려왔다. 말 위에서 고구려인의 눈길로 내려다보는 압록강은 깊고 푸른 물이 철철 흐르는 국경의 강이 아니라 청계천 정도에 불과했다. 두만강도 그랬다. 중류에 이를 때까지도 동네 앞 냇가 정도였다. 또 한 번 속은 것이다. 일본인들이 규정한 ‘조선반도’는 역사 용어가 될 수 없었다. 만주와 한반도는 사실상 하나의 땅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만주 일대에 살았던 종족이나 언어, 문화와 유물들을 고려하면 그 지역은 우리의 생활영역, 역사공동체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 너른 땅을 빼앗긴 뒤에는 선비족(몽골), 거란족,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며 선을 그었다. 근대 들어서는 일본인들의 이상한 논리에 넘어가 역사마저 포기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입한 조선반도는 그리스반도나 이탈리아반도, 이베리아반도처럼 해양활동이 왕성했고, 한때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그런 반도가 아니었다. 해양활동이 전혀 없거나 매우 미약했고, 바다에 포위돼 있는 아주 제한된 공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넓은 만주를 망각했고, 역동적인 해양활동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서해는 내해(內海)

동아시아는 현재 중국이 있는 대륙, 북방으로 연결되는 대륙의 일부, 그리고 일본열도로 이뤄졌으며 그 안에 바다가 있다. 전형적인 대륙 간 지중해(multicontinental-mediterranean-sea)는 아니지만 다국 간 지중해(multinational-mediterranean-sea)의 형태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 한륙도(韓陸島·남만주와 한반도를 포함한 개념)가 있다.

한반도의 남쪽과 일본열도는 불과 50㎞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마도와 동해를 통해 연결된다. 연해주와 사할린은 동해 북부(타타르해 포함)를 통해, 그리고 남만주와 한반도, 일본열도는 서해와 동중국해를 이용해 중국 지역과 교류할 수 있다. 특히 서해는 한·중 간 300~400㎞로 그 거리가 짧은 데다 해상 상태도 비교적 안정된 일종의 내해(inland sea)다. 계절풍 지대여서 북서풍과 남풍을 적절하게 이용하면 여러 방향으로 항해가 가능하다. 해류도 쿠로시오를 타면 저장성 이남과 오키나와 지역에서 제주도와 한반도 남부에 상륙할 수 있다. 동해에서는 리만한류를 타면 연해주 앞바다에서 경북의 해양까지 남하할 수 있다.

이런 자연환경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주민들의 생활과 문화는 물론, 지역 간 또는 나라 사이에 해양교섭이 활발히 이뤄졌다. 당연히 이 지역에서 명멸한 모든 국가는 생존을 위해 해양활동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동아지중해의 허브

문제는 하나 있었다. 기계동력이 없었던 전근대에는 방향을 판정하는 항법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파도와 폭풍을 이겨내고 많은 물자를 실을 수 있는 배를 만드는 조선술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가능하면 육지와 가까운 해역을 항해하고, 중간에 피항을 하면서 물과 식량을 보급받을 수 있는 경유지가 필요했다. 동아지중해의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 땅과 바다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1994년에 배를 타고 90일간 유럽까지 항해하면서 지중해(유럽·아프리카·아시아 지중해)를 왕복했다. ‘트로이 전쟁’ ‘살라미스 해전’을 떠올리면서 에게해를 통과했다. 이탈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 사이의 파고 높은 협수로, 시칠리섬 등을 통과할 때는 로마의 영광과 카르타고의 붕괴 역사가 저절로 떠올랐다. 동시에 내가 세운 ‘동아지중해 모델’과 ‘한민족 역할론’이 실체로서 다가왔다.

유럽의 지중해는 원거리 항해가 활발한 무역공동체였다. 여러 인종이 섞이며 다양한 문화를 혼유하는 문화공동체이자, 무역정보와 해양기술도 부분적으로 공유한 해양공동체였다. 동아지중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꼭 이탈리아반도와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교통의 인터체인지였고, 물류와 정보의 허브였으며, 한자·불교·유교 등을 공유한 문화의 심장이었다. 정치·외교적으로는 역학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중핵(core)이었다. 당연히 우리 역사상 대부분 국가는 해양을 활용하는 정책을 펼쳤고 해양력을 강화했다. 조선만 빼놓고는 그랬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 기억해주세요

동아시아는 현재 중국이 있는 대륙, 북방으로 연결되는 대륙의 일부, 그리고 일본열도로 이뤄졌으며 그 안에 서해 바다가 있다. 우리는 교통의 인터체인지였고, 물류와 정보의 허브였으며, 한자·불교·유교 등을 공유한 문화의 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