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39·끝) 소농경제의 발달
18세기 김홍도가 그린 타작(打作)
18세기 김홍도가 그린 타작(打作)
1660년대 이후 한 세기 동안 조선의 경제는 양적으로 성장 추세였다. 인구가 증가하고 농지가 개간되고 장시가 확산했다. 그에 자극을 받아 농업생산도 단위 토지에 많은 노동과 비료를 투하하는 다로다비(多勞多肥)의 집약농법으로 진전했다. 17세기 후반부터 논농사에 묘판에서 벼를 키운 다음 논으로 옮겨 심는 모내기, 곧 이앙법(移秧法)이 보급됐다. 이전에는 논에 직접 볍씨를 뿌려 벼를 키우는 직파법(直播法)이 일반적이었다.

이앙법은 직파법에 비해 제초 노동을 절반으로 감소시켰다. 이에 노동력이 적은 소규모 가족농, 곧 소농(小農)의 경제적 자립성이 높아졌다. 밭농사에서는 보리와 콩을 연달아 심는 1년2작이나 조, 보리, 콩을 연달아 심는 2년3작의 집약농법이 성숙했다.

노비제의 해체

인구의 30~40%까지 차지했던 노비제가 해체 조짐을 보이는 것은 1660년대다. 그 무렵부터 조선왕조의 노비 정책이 친(親)노비제에서 반(反)노비제로 바뀌었다. 조선왕조는 청에 항복한 치욕을 갚기 위해 북벌(北伐)을 추구했는데, 그를 위해 노비제를 억제하고 양인 농민을 다수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왕조는 양반가 주변에 분포한 입역노비를 대대적으로 조사해 호적에 등록했다. 1669년 노와 양녀가 낳은 자식을 양인으로 돌리는 종량법(從良法)이 제정됐다.

노비제의 해체를 이끈 힘은 정책적이기보다 경제적인 것이었다. 집약농법의 발전에 따른 토지 소출 증가는 하층 농가의 자립성을 드높였다. 장시의 확산은 농가가 생계소득을 확보하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했다. 무엇보다 큰 요인은 인구 증가였다.

1680년대 들어 노비 가격이 갑자기 5분의 1 이하로 폭락했다. 이후 노비들은 별로 어렵지 않게 주인에게 몇 년어치 몸값을 한꺼번에 바치고 해방될 수 있었다. 19세기 노비 인구 비중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운데, 대략 10% 전후로 보인다. 어쨌든 노비 인구 비중이 30~40%에서 약 10%로 크게 줄어든 것은 노비가 자립적 소농으로 성립한 역사적 성취에 의해서였다. 18세기에 걸쳐 조선은 노예제사회의 기풍을 벗어나 ‘동의와 계약’의 원리가 작용하는 소농사회로 조금씩 전진했다.

소농 표준화

농가의 토지가 얼마였는지는 현재 전하는 조선왕조의 양안(量案·토지대장)을 통해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남해군에 용동궁(龍洞宮)이라 불린 왕실의 땅을 조사한 양안에 의하면 1㏊ 미만을 경작한 농가의 경지점유율은 1681년에만 해도 26%에 불과했다. 그것이 1845년까지 50%로, 나아가 1905년까지 75%로 증가했다. 반면 2㏊ 이상을 경작한 상층 농가의 경지점유율은 49%, 25%, 7%로 쭉 감소했다. 그렇게 역사의 대세는 소농 표준화의 방향이었다.

노비제가 해체되자 양반의 농업은 병작의 방식으로 이행했다. 병작은 한 사람은 토지를 내고 다른 한 사람은 노동력을 내어 합작으로 농사를 짓는 관계를 말한다. 토지를 내는 사람은 전주(田主) 또는 답주(畓主)라 했으며, 노동력을 내는 사람은 작인(作人)이라 했다. 몇몇 지방의 양안에 의하면 19세기 병작의 보급률은 60%를 초과했다.

소농 자립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약간의 타격에도 무너지기 쉬운 취약한 구조였다. 잦은 흉작이 가장 큰 위협이었다. 군포의 수취로 관철된 왕조의 개별 인신 지배체제도 큰 위협이었다. 농촌 시장과 공업의 수준이 낮은 것도 큰 원인이었다. 소농 자립이 전반적으로 성취되는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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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노비 인구 비중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운데, 대략 10% 전후로 보인다. 어쨌든 노비 인구 비중이 30~40%에서 약 10%로 크게 줄어든 것은 노비가 자립적 소농으로 성립한 역사적 성취에 의해서였다. 18세기에 걸쳐 조선은 노예제사회의 기풍을 벗어나 ‘동의와 계약’의 원리가 작용하는 소농사회로 조금씩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