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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647호 2019년 10월 7일

경제사 이야기

고려때 노비는 ‘사회적 인격’ 있어…조선과 달랐죠…무신정권기엔 정계진출도…‘노예제 사회설’은 잘못

고려는 노비의 복식을 차별하려고 노력했다. 사노(私奴)는 모자를 쓸 수 없다는 금령이 내려졌지만 얼마 있지 않아 흐지부지됐다. 노는 요대(腰帶)를 할 수 없다는 금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12세기 초 개경을 방문한 서긍은 귀천 간에 복식의 차별이 없음을 기이하게 여겨 그의 견문록에서 몇 차례나 이를 지적했다.

동시대 일본의 노비에게 강요된 복식의 차별은 엄격했다. 일본 노비는 동발(童髮)이며 오모자(烏帽子)를 쓸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고려 노비와 주인 간의 신분율(身分律)은 의외로 느슨했다. 어느 비부(婢夫)가 처의 주인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비부는 유배형에 처해졌을 뿐이다. 조선시대라면 예외 없이 참형에 해당하는 중대 범죄였다. 주인의 범죄를 고발해 처벌받게 한 노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려왕조는 유교의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에 입각해 형사(刑事)에 관한 행정을 엄격하게 집행한 나라가 아니었다.

“장상에 어찌 종자가 있느냐”…노비 ‘만적의 난’

고려의 노비에게서 그의 사회적 죽음을 나타내는 상징을 찾기는 힘들다. 그들의 사회적 인격은 살아있는 편이었다. 이 같은 고려 노비의 존재 양태는 그들이 원래 형벌에 기원을 둔 국가노예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정치적 이유로 노비가 됐으며, 정치적 상황이 변하면 얼마든지 해방될 수 있는 존재였다.

무신집권기에 노 출신으로서 고관이나 장군으로 출세한 사람이 많았다. 집권자의 한 사람인 이의민은 경주의 어느 사비(寺婢)의 아들이었다. 그러자 개경의 사노 만적이 난을 모의하면서 “장상(將相)에 어찌 종자가 있느냐”고 했다. 개경의 노들은 주인을 죽이고 스스로 장상이 되고자 했다.

이 같은 신분의식을 조선시대의 노비로부터 찾기는 불가능하다. 고려시대에 걸쳐 총 10회의 노비 반란이 있었다. 반면 조선왕조 5세기간에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조선의 노비는 개의 똥이나 오줌에 비유되는 존재였다.

반면 고려의 노비는 사회적으로는 반드시 천하지 않았다. 주인이 총애하면 노는 해방되고 심지어 고귀한 자로 출세했다. 고려의 노 가운데 고급 관료로 출세한 ‘엘리트 노’가 적지 않은 것은 고려의 주노(主奴) 관계가 지닌 이런 특징 때문이다.

제시된 자료는 고려 궁중에서 연주된 내당(內堂)이란 가요다. 그에 관한 국문학자들의 해석은 한결같지 않다. 내가 읽기엔 어느 귀부인이 13명의 남종을 데리고 조용한 계곡을 찾아 그들을 씻긴 다음 성적 열락에 든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간단한 세정례(洗淨禮)만으로 주인과의 성적 교섭이 가능할 만큼 고려의 노비들은 깨끗한 존재였다.

“인구 30% 이상이 노예” 주장은 낭설

미국의 한국사 연구자 제임스 팔래 교수는 고려왕조를 노예제 사회라고 규정했다. 세계 노예제 역사의 권위자인 올란도 패터슨 교수는 한국사에서 대규모 노예제가 장기 지속한 대표적인 사례를 발견한다고 했다. 그들이 잘못된 학설을 제기한 데는 한국 측 책임이 크다. 한국의 역사가들은 고려사회는 지주-소작의 계급관계로 분화된 사회이며, 소작농의 중심부는 노비라고 생각해 왔다. 여기에 팔래가 덧붙인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노비는 주인의 재물로서 자유롭게 매매되거나 처형돼도 무방한 진정한 의미의 노예였다. 둘째, 노비가 전체 인구의 30% 이상을 점했다. 팔래는 지주-소작관계가 기본 생산관계를 이루고 소작농의 중심이 노비로서 노예라면, 그런 사회는 노예제사회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25~26회) 연재에서 지적한 대로 고려시대가 지주-소작으로 분화된 계급사회라는 인식은 전호(佃戶)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기초한 것이다. 고려의 전호는 지주의 소작농이 아니라 국가 토지를 경작하는 양인 농민을 말했다. 고려시대에 지주제가 발달했다는 증거는 단 한 조각도 전하지 않는다. 노비의 인구 비중이 얼마인지를 전하는 두어 가지 사례에 의하면 5%를 넘기 힘들었다.

고려의 노비는 국인들의 가내노예나 종자였다. 귀족이라 해도 노비 규모는 10∼20명을 넘지 않았다. (지난주에) 제시된 (사진)자료는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랜 상속문서다. 1354년 윤광전이란 하급 관료가 독자에게 고작 한 명의 비를 지급하는 내용이다. 농촌으로 내려가면 노비의 모습을 구경하기는 힘들었다. ‘30% 이상’ 운운은 애당초 낭설이었다.

■기억해주세요

고려의 노비에게서 그의 사회적 죽음을 나타내는 상징을 찾기는 힘들다. 그들의 사회적 인격은 살아있는 편이었다. 그들은 정치적 이유로 노비가 됐으며, 정치적 상황이 변하면 얼마든지 해방될 수 있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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