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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덕률풍'에서 '스마트폰'까지

    코로나19 사태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꾸고 있다. 우리말에도 이미 영향을 끼쳤다. 관련 외래어가 새로 선보이거나 다시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언택트’도 그런 말 중의 하나다. ‘언택트 마케팅, 언택트 소비, 언택트 서비스, 언택트 쇼핑, 언택트 문화….’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쓰인다는 점에서 이 말은 생산성이 꽤 높다.‘텔레폰’을 음역해 ‘덕률풍’으로 불러‘비대면’ ‘비접촉’ 정도로 번역되는 이 말은 사실 코로나19 이전부터 쓰였다. 금융업 등에서 ‘비대면(非對面) 계좌 개설’, ‘비대면 서비스’ 식으로 많이 소개됐다. 그러던 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말 ‘비대면’보다 ‘언택트’가 전면에 부각돼 더 활발하게 쓰인다는 점은 다소 역설적이다. 현실 언어에서 외래어에 밀리는 우리말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어찌됐든 ‘언택트’의 부상은 우리 커뮤니케이션의 행태와 질서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전조임에 틀림없다. 소통의 측면에서 보면 ‘언택트의 원조’로 전화를 꼽을 만하다.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끼리 서로 얘기를 나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전화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인 것은 1898년, 지금으로부터 122년 전이었다. 개화기 서양문물이 한창 밀려들어 오던 시절이었다. 당시 궁내부(宮內部) 주관으로 궁중에서 각 아문(衙門)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덕수궁에 전화 시설을 마련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텔레폰(telephone)’의 발음을 본떠 한자식으로 음역해 ‘덕률풍(德律風)’이라고 불렀다(정확히는 중국에서 ‘德律風’으로 쓰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살펴보다'는 붙이고, '마주 보다'는 띄어 쓰죠

    합성어와 파생어는 우리말 어휘를 풍성하게 하는 요소다. 합성어는 단어끼리 결합해 새로운 말을 만든다. 파생어란 단어에 접두사나 접미사가 붙어 역시 새 의미를 더한 말이다. 우리말은 단어별로 띄어 쓰므로 합성어와 파생어는 언제나 붙여 쓴다. 문제는 합성어 또는 파생어인지 여부를 구별하는 게 쉽지 않다는 데 있다.합성어는 단어끼리 결합해 새로운 의미 더해우선 사전에 올라 있으면 단어이므로 붙여 쓰면 된다. 원래의 글자 의미에서 벗어나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요령이다. 합성어든 파생어든 무언가 새로운 의미를 더해 이뤄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령 ‘들여다보다’ ‘살펴보다’ ‘되돌아보다’는 합성어다. 사전(표준국어대사전 기준)에 단어로 올라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다’ ‘마주보다’는 없다. 단어가 아니므로 ‘돌이켜 보다’ ‘마주 보다’로 띄어 써야 한다. 앞의 세 단어는 글자 그대로의 뜻 외에 ‘자세히 살피다’ ‘과거를 회상하다’란 의미가 더해진 말이니 합성어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뒤의 두 표현은 원래 단어가 갖는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사전에 모든 단어를 올릴 수 없으므로 준거가 되는 말을 보고 나머지는 거기에 맞춰 쓰면 되지 않을까? 가령 ‘들여다보다’가 있으므로 비슷한 형태인 ‘돌이켜보다’도 한 단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참고로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는 ‘돌이켜보다’ ‘마주보다’가 단어로 올라 있다). 이에 대한 국립국어원 견해는 ‘그렇지 않다’이다. 국어원 ‘온라인가나다’에 따르면 “합성어라고 본 경우 사전에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한숨짓다'는 붙이고 '미소 짓다'는 띄어 쓰죠

    ‘먼저 인사하는 공항 가족, 미소 짖는 고객.’ 이 문구를 보는 순간 잘못 쓴 글자를 찾아냈다면 그 사람은 우리말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 해도 될 것이다. 오래전 김포공항 청사 내 안내 전광판에 흐르던 문구다. 당시 한 국회의원이 국정감사장에서 “‘개가 짖는다’와 ‘미소 짓는다’의 차이도 모르느냐”며 우리말 오용 실태를 질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합성어 여부에 따라 띄어쓰기 달라져‘미소 짓다’는 자칫 표기를 틀리기도 하지만 띄어쓰기는 더 까다롭다. ‘짓다’는 누구나 알다시피 동사다. 보조용언이나 접사로서의 기능은 없다. 이 말이 명사와 어울려 여러 합성어를 낳았다. ‘죄짓다, 한숨짓다, 짝짓다, 농사짓다, 눈물짓다’ 등이 그 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짓다’와 결합한 동사가 20개도 넘게 나온다. 그런데 ‘짓다’와 어울리는 수많은 말 가운데 어디까지가 합성어인지 알 도리가 없다. 대개는 사전에 올랐으니 합성어인 줄 아는 식이다. 가령 ‘한숨짓다’와 비슷한 계열인 ‘미소짓다’는 사전에 없다. 그러니 단어별로 띄어 쓴다는 규정에 따라 ‘미소 짓다’로 해야 한다.‘떼지어 다니다’ 할 때도 심리적으로 ‘떼지어’로 붙여 쓰고 싶지만 ‘떼짓다’란 말은 사전에 없다. ‘떼 지어 다니다’이다. ‘마무리 짓다, 일단락 짓다, 이름 짓다’도 다 띄어 써야 한다. 그런 말이 사전 올림말에 없기 때문이다.수많은 단어를 일일이 외워 써야 한다면 이는 너무도 비효율적인 일이다. 범용성 있는 원칙을 세울 필요가 있다. 우선 ‘짓다’에 접사 기능을 부여할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띄어쓰기가 중요한 이유

    한때 수원~광명 고속도로상에 야릇한 이름의 표지판이 등장해 화젯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동시흥분기점’이 그것이다. “동시흥분기점까지 6㎞ 남았다네…. 근데 이 이상한 이름은 뭐지?” 2016년 개통한 이후 운전자들에게 ‘엉뚱한 상상력’을 자극하던 이 명칭은 2017년 말께 ‘동시흥 분기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띄어쓰기로 엉뚱한 상상력 유발을 차단한 것이다.‘열쇠 받는 곳’이라 하면 금세 알아예전에 ‘키불출장소’란 말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쓰인다. 이 말도 사연을 알고 나면 “아하! 그렇구나” 하겠지만 모르고서는 희한한 말일 뿐이다. “키불 출장소? 그런 데도 있나?” 사람들은 낯선 말을 받아들일 때 대개 자신에게 익숙한 단어 단위로 인식한다. 동시흥분기점은 ‘동시 흥분 기점’으로, 키불출장소는 ‘키불 출장소’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 언어 인식체계가 그렇게 구조화돼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소통’에 실패한 사례다.한편으론 우리말 육성과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시사한다. 하나는 띄어쓰기의 중요성이고, 다른 하나는 쉬운 말로 쓰기다. 우선 띄어쓰기를 하면 조금 나아진다. ‘동시흥 분기점’이라 하면 아쉬운 대로 의미 전달이 훨씬 잘 된다.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몸에 익어 알기 쉬운 순우리말로 풀어쓰는 것이다.분기점(分岐點)은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다. 영어 약자 ‘JC(junction)’를 다듬었다. 고속도로와 다른 고속도로를 연결해주는, 고속도로를 갈아타는 교차로를 말한다. 전에 ‘동시흥JC’라고 하던 것을 그나마 우리말로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서너 명'이 옳고 '세네 명'은 틀리죠 ~

    우리말 수의 세계는 들여다볼수록 오묘하다. 그동안 ‘맞춤법 바로 알기’를 통해 우리말 수사에 한자어 계열과 고유어 계열이 있다는 것을 살펴봤다. 하나, 둘, 셋 등이 고유어 수사고 일(一), 이(二), 삼(三) 같은 게 한자어 수사다. 고유어 수사는 관형어로 쓸 때 ‘한, 두, 세’ 식으로 또 변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더 복잡하다. 뒤에 오는 단위명사가 무엇이냐에 따라 ‘서 말’과 ‘석 자’ ‘세 명’ 식으로 구별해 쓰기도 해야 한다.서 돈, 서 말은 돼도 석 돈, 석 말은 안 써표준어규정 17항은 이들을 구별하는 까닭을 담고 있다. 요약하면, ‘의미는 같되 비슷한 발음으로 몇 가지가 쓰일 경우 그중 더 널리 쓰이는 하나를 표준어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선택된 게 ‘돈, 말, 발, 푼’ 앞에서는 ‘서-’다. ‘세-/석-’은 쓰지 못한다. ‘냥, 되, 섬, 자’ 앞에서는 ‘석-’을 쓰고 ‘세-’는 버렸다. ‘서-’는 당연히 못 쓴다. ‘넷’의 관형형인 ‘너-’와 ‘넉-, 네-’를 구별해 쓰는 요령도 같다. ‘돈, 말, 발, 푼’ 앞에서는 ‘서-, 너-’가, ‘냥, 되, 섬, 자’ 앞에서는 ‘석-, 넉-’이 주로 쓰이기 때문이다.그 외의 단어가 올 때는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로 무엇이 더 널리 쓰이는지를 보면 된다. 예컨대 ‘(보리) 서/너 홉’, ‘(종이) 석/넉 장’과 같이 쓸 수 있다. ‘세/네’는 비교적 널리 통용된다. 따라서 이를 ‘세/네 홉’, ‘세/네 장’이라 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은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모든 단위명사를 분류해 제시할 수는 없기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칠칠맞다"는 칭찬하는 말이에요~

    지난 4월 치러진 삼성그룹 직무적성검사(GSAT)에서는 언어논리가 특히 어려웠다고 한다. 인터넷에는 ‘칠칠하다’ ‘서슴다’ 같은 생소한(?) 단어 앞에서 ‘멘붕’을 느꼈다는 후기가 잇따랐다. 이런 말은 낯설다기보다 우리말 용법의 허를 찌르는 사례라 할 만하다. 이들은 단독으로는 잘 쓰이지 않고 주로 ‘못하다/않다/없다’ 등 부정어와 어울려 쓰인다. 그러다 보니 본래 의미를 간과하게 된, 그러기 십상인 말이라는 점에서 그렇다.‘알차다’에서 ‘야무지다’로 의미 확대돼흔히 쓰는 용법을 토대로 원래 형태의 의미를 추리하고 응용하는 능력을 파악하기에 적절한 사례들이다. SNS 등의 ‘일탈적 언어’ 사용에 익숙한 세대일수록 낯설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언어 등 규범어를 꾸준히 접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였다. 생글 코너를 통해서도 몇 차례 다룬 내용이었다.‘칠칠하다, 서슴다, 탐탁하다, 심상하다, 아랑곳하다.’ 얼핏 보면 의미가 잘 안 떠오른다. 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부정어와 함께 쓰는 말이라는 점이다. ‘칠칠하지 못하다, 서슴지 않다, 탐탁지 않다, 심상치 않다, 아랑곳없다.’ 이렇게 하고 보면 이들이 일상에서 흔히 쓰는, 아주 익숙한 말이라는 게 드러난다. 하지만 부정어를 떼어내고는 잘 쓰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 의미가 퇴색해 기억에서 멀어진 것일 뿐이다.‘칠칠하다’는 본래 나무나 풀, 머리털 따위가 잘 자라서 알차고 길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검고 칠칠한 머리’ 같은 표현에 이 말의 본래 쓰임새가 살아 있다. 물론 지금도 쓰는 말이다. 이 말이 의미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우리말을 해치는 표현들 (1) '만들다'의 유혹에서 벗어나자

    “언어를 다듬는 데는 조화롭고 아름다우며 정결하고 정미하게 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 형태가 다양해 한 가지로 개괄할 수 없고, 내용이 명료해 여러 가지로 나눠지지 않으며, 형태와 내용이 적절하게 알맞아야 합니다.”(이건창, ‘조선의 마지막 문장’) 조선 후기 3대 문장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건창(1852~1898)이 말하는 작문 비법 한토막이다. 학자이자 문신인 여규형이 작문에 대한 가르침을 달라고 청하자 편지로 답하는 형식을 빌려 썼다.10여 가지로 쓰는 ‘만들다’, 의미 모호해그의 문장론은 요즘의 글쓰기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나다. 지금의 눈으로 해석하면 단어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심혈을 기울이고, 다양한 ‘말’을 쓰되 ‘뜻’이 명료해야 한다는 게 요지다. 그런 관점에서 최근 우리 문장을 병들게 하는 표현들을 살펴보자. 언제부터인지 이런 말들이 시나브로 널리 퍼졌다.△어린이들이 ‘한가위 음식 만들기’ 체험행사에서 송편을 만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나팔꽃이 자라면서 창문에는 그늘이 만들어져 시원했다. △시민도 정부도 행복한 지속가능한 해법을 만들었다. △실내에서 운동을 하도록 체육관을 만든다.예문에는 서술어로 모두 ‘만들다’가 쓰였다. 이 말이 왜 문제가 될까? <표준국어대사전>(1999년)은 올림말 ‘만들다’에 13개의 풀이를 올렸다. 뜻풀이 첫 항목은 ‘노력이나 기술 따위를 들여 목적하는 사물을 이루다’이다. ‘음식을 만들다/오랜 공사 끝에 터널을 만들었다/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었다’ 같은 게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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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절'은 하루 아닌 6시간이죠

    '낮'은 하루를 밤·낮으로 나눠 해가 떠 있는 동안을 말하니 대략 12시간이다. 나절은 그 낮의 절반에 해당하는 동안이다. 오전이나 오후 어느 한쪽의 낮을 가리켜 '한나절'이라고 한다. 6시간쯤 되는 셈이다.미·북 정상회담이 열린 6월12일. 오후 4시가 넘어가자 이들의 만남 결과를 전하는 소식들이 보도를 타기 시작했다. 그중 한 통신사와 한 방송사의 제목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140분 담판→화기애애한 오찬→역사적 서명 … 숨가쁜 한나절’ ‘트럼프·김정은, 역사를 만들었다 … 그들이 보낸 숨가쁜 반나절’.하룻낮>한나절>반나절로 줄어들어같은 시간을 전하면서 한 곳에선 한나절, 다른 데선 반나절이라고 했다. 한나절과 반나절은 다른 말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옛날에는 시간 개념이 지금처럼 시, 분, 초로 세분화되지 않았다. ‘일상에서 활동하는 동안’을 어림잡아 기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생겨난 게 한나절이니 반나절이니, 한식경이니 일다경이니 하는 말들이다. 그중 한나절과 반나절은 유난히 헷갈려 하는 이들이 많다.한나절, 반나절에서 핵심어는 ‘나절’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나절은 어원이 확인되지 않은 말이다. ‘낮+알(파생접미사)’ 또는 ‘낮+절(折/切)’에서 변화한 것으로 추정만 할 뿐이다(고려대 한국어대사전). ‘낮’은 하루를 밤·낮으로 나눠 해가 떠 있는 동안을 말하니 대략 12시간이다. 그것을 ‘하룻낮’이라고 한다. 나절은 그 낮의 절반에 해당하는 동안이다. 오전이나 오후 어느 한쪽의 낮을 가리켜 ‘한나절’이라고 한다. 6시간쯤 되는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