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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기타

    "독립하지 않고 언제나 아이로 남아있으려는 '피터팬'… 정부의 과도한 보호는 중소기업들의 성장 막아요"

    누구나 한 번쯤 ?피터팬?을 책으로 읽거나 영화 또는 애니메이션으로 보았으리라. 영원히 어 른이 되지 않는 나라, 네버랜드에 사는 피터팬, 그리고 요정 팅커벨. 어느 날 밤, 우연히 피터팬 을 만나 네버랜드로 함께 모험을 떠난 소녀 웬디와 두 남동생, 피터팬과 맞서며 호시탐탐 나쁜 짓을 저지를 기회를 엿보는 후크 선장 등등. 꿈의 나라 네버랜드에서 벌어지는 모험 이야기는 지금까지 수많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피터팬》을 읽어보자아이들의 영웅 피터팬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피터팬 증후군’은 말 그대로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피터팬처럼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고 언제까지나 아이로 남아 있으려는 현대인의 심리적 질병 상태를 가리킨다. 흔히 ‘어른아이’로 불리는 피터팬 증후군 환자들은 육체적으로 성숙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는 어린이처럼 보호받고 의존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어른들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사회적이고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인 특징을 보인다.피터팬 증후군은 다 자란 젊은이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창 활발하게 사회경제 활동을 해야 하는 젊은이들이 자기만의 네버랜드에 틀어박혀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 사회가 과연 발전할 수 있겠는가. 노동력 이탈로 경제가 침체되고, 사회 구성원 간의 교류가 사라지니 문화가 발전할 리 만무하다. 더군다나 어른으로 자립해 새로운 가구를 구성하지 못하니 사회 존속마저 위협할 수 있다. 또한, 피터팬 증후군 환자의 개인적 삶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사회경제적인 무기력은 자존감 하락으로 이어지고 끝내 비극적인 말년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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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윌리엄 3세는 창문 수에 따라 세금 물렸어요… 루이 16세의 과도한 세금은 프랑스혁명 도화선 됐죠"

    ‘창문세’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창문세는 한 주택에 존재하는 창문의 수에 따라 세금 을 부과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 황당한 세금은 1696년 영국의 윌리엄 3세 때 만들어졌다. 당시 윌리엄 3세는 아일랜드 구교도의 반란을 저지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이 경비를 충 당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창문세였다.왕실 경비와 세금창문세 이전에는 화로세라는 것이 있었다. 짐작하는 대로 화로세는 주택 내에 설치된 벽난로의 수만큼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생활 침해 문제가 제기되면서 폐지됐다. 벽난로 수를 세려면 조사관이 집안을 들여다봐야만 하는데 사적 공간을 조사관에게 보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격렬하게 화로세에 반발했고, 결국 화로세는 폐지됐다. 그 대신 등장한 것이 바로 창문세다. 창문은 집안이 아니라 밖에서도 얼마든지 셀 수 있기 때문이다.창문세를 처음 시행할 무렵만 해도 윌리엄 3세는 득의양양했다. 이제 사람들이 고스란히 세금을 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윌리엄 3세의 자신감은 오만한 착각이었다. 창문세에 부담을 느낀 사람들이 차례차례 창문을 막아버리기 시작했다. 이는 밝고 따스한 햇볕을 사람들이 스스로 포기할 만큼 세금에 대한 부담감과 저항감이 컸다는 뜻이다. 창문세가 신설된 이후 영국의 건축물은 기존 창문은 막혀버리고 새로 짓는 건물은 창문 없이 지어지면서 아주 기이한 형태를 띠게 됐다.차라리 창문 없앤다창문세는 엄밀히 말해 일종의 ‘부유세’로 볼 수 있다. 돈이 많고 부유할수록 집이 크고 창문이 많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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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강국이었던 아르헨티나가 몰락한 이유는 산업 국유화·외국자본 축출·인기영합 정책 탓이죠"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Don’t cry for me, Argentina)”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이 유명한 가사는 ‘에비타’라는 뮤지컬에서 에바 페론 역할을 맡은 여 주인공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 한 소절이다.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배우 출신으로 후안 페론 대통령의 부인이다.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성녀로 불리며 당시 퍼스트레이디로서 엄청난 인기 를 누렸지만, 한편으로는 아르헨티나가 경제적으로 타락의 길을 걷게 된 페론주의와 포퓰리즘 의 온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에바 페론과 페론주의1946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에바 페론은 남편 후안 페론의 든든한 지지자가 된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그녀는 선동적이며 타인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지 못했음에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배우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점은 노동자와 빈민들에게도 호응을 얻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연설에 국민들은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 그녀 덕분에 후안 페론은 정치적으로 큰 힘을 얻었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폐쇄적 보호주의로 일관대통령이 된 후 후안 페론은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정책을 펼치며 대중의 인기를 얻지만 경제는 점점 쇠락의 길을 걷는다. 에바 페론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을 하며 성녀로 추앙받지만 실제적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적인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페론 정권은 겉으로는 약자를 위한 정책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통제와 억압을 일삼는 독재정치를 펼친 것이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경제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경직된 국가가 되고 만다.1900년대 초만 해도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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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가 돈을 마구 찍어내면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발생… 짐바브웨 달러·고종 때 발행된 당백전은 전형적인 사례"

    짐바브웨와 2억%의 인플레이션짐바브웨에서는 왜 이토록 엄청난 고액 지폐를 발행한 것일까? 이유는 극심한 인플레이션 때문이었다. 짐바브웨는 1990년대 최악의 가뭄 사태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토지개혁을 강행했는데, 이때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가 화폐를 마구 찍어대기 시작했다. 게다가 2000년대 초반부터 강화해 온 가격 통제와 외환 통제, 수출입 통제 등 정부의 통제 정책으로 실물 및 금융 경제가 심각하게 왜곡되면서 짐바브웨는 1999년 이래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였다. 그 결과 짐바브웨는 세계 최고 수준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고, 2008년에는 물가상승률이 무려 2억% 이상으로 치솟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당시 300조 짐바브웨달러는 고작 1달러와 맞먹는 정도에 불과했다.이에 짐바브웨 정부는 2009년 1월 100조달러짜리 지폐를 새로 발행하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같은 해 4월, 짐바브웨 정부는 자국 화폐 발행을 중단하고 미국 달러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재정지출을 위해 돈을 찍는다이처럼 통화 발행이 물가를 올리는 현상은 정부가 재정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통화 팽창 정책을 채택하면서 발생한다. 과거 구한말에 흥선대원군의 통화 팽창 정책으로 인해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일이 있다. 고종의 즉위로 섭정을 하게 된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경복궁 재건사업을 단행하는 한편,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군대를 증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업은 조선 정부에 재정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안겨 주었고, 흥선대원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당백전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당백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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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을 가난으로 몰아넣은 호찌민과 마오쩌둥… 번영은 지도자 개인이 아니라 경제 체제가 만든다"

    19세기 중반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암울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찌민이 태어났다. 그는 나중에 베트남의 영웅으로 존경받는다. 그 주된 이유는 오직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았으며 청렴하고 도덕적인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오직 나라와 국민을 위해 평생을 바친 지도자 호찌민. 그런 그가 이끄는 베트남의 모습은 어땠을까?청빈했던 호찌민 치하의 가난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의 경제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호찌민은 과감한 농지개혁과 외교활동을 펼쳤다.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중국, 소련과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하지만 경제는 좋아지지 않았다. 호찌민은 공산주의 이념을 통해 베트남의 모든 국민이 잘살기를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호 아저씨’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베트남 국민에게 친근한 지도자였으며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풍요만큼은 죽을 때까지 이뤄내지 못했다. 2011년 베트남은 세계 경제 순위가 151위에 불과했다. 이는 단순히 지도자의 청렴결백함이 경제를 살리는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권력을 통해 그 어떤 이득도 취하지 않은 호찌민. 자신의 일생을 조국과 함께한 호찌민. 이런 그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어린 시절 호찌민의 이웃 마을에는 베트남의 유명한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판보이쩌우가 살았다. 판보이쩌우는 베트남 역사에 심취한 호찌민에게 근대화된 일본에 대해 공부해볼 것을 권했다. 하지만 호찌민은 일본에 기대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하고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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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게가 모여 있어야 고객이 많이 와요… 경쟁의 선순환으로 전체 파이가 커지는 거죠"

    박중훈은 누구나 다 아는 국민배우다.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이력이 있다는 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2013년 영화 ‘톱스타’의 연출을 맡으며 영화감독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영화 내용이 톱스타의 자리에 있다가 좌절을 겪고 다시 재기에 성공하는 박중훈 본인의 인생사와도 비슷해 세간의 화제가 됐다.박중훈과 하정우재미있는 건 ‘톱스타’가 발표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영화배우 하정우가 연출한 영화 ‘롤러코스터’도 개봉했다는 것이다. 두 정상급 톱스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이유 때문에 두 영화는 자연스레 비교 대상이 됐다.영화 홍보를 위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박중훈에게 기자가 그런 비슷한 질문을 던진 모양이었다. 공교롭게도 ‘톱스타’와 ‘롤러코스터’는 부산국제영화제에 둘 다 초청받았다. 두 영화를 비교하는 질문이 안 나올 수 없는 터에 데뷔한 지 30년에 가까운 노련한 베테랑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하정우는 재능 있는 친구인데 영화 ‘롤러코스터’에서 그 재능이 과연 없어졌을까요? 저와 하정우가 감독을 한다고 해서 화제가 됐는데 똑같은 처지에 있는 분이 있으니 더 좋습니다. 영화라는 건 제로섬 게임이 아닙니다. 관객들은 영화가 둘 다 좋으면 둘 다 보고 둘 다 나쁘면 둘 다 보지 않으니까요. 멋진 후배 하정우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박중훈의 말처럼 영화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관객들은 좋은 영화가 많으면 많이 보고 별로다 싶으면 보지 않는다. 영화 대신 연극이나 뮤지컬을 볼 수 있고 책을 볼 수도 있다. 여행을 가거나 친구와 술을 마실 수도 있다. 여가 시간을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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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 3분의 1이 사망한 이후 인구감소로 임금올라 결국 중세가 무너졌죠

    질병은 인류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때로는 역사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1910년대 유행한 스페인 독감은 사망자 숫자만 무려 수천만 명에 달했다. 어찌나 피해가 심했던지 스페인 독감이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당겼다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다.몽고군이 가져간 것흑사병이 유럽에 출현한 시기는 14세기로 1348~1350년 무렵이다. 불과 서너 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흑사병으로 중세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500만 명이 사망했다. 유행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데도 피해가 극심했던 건, 흑사병의 특성상 한 번 발병하면 짧으면 여섯 시간, 길어야 닷새 안에 사망하기 때문이다.흑사병의 원인균인 가래톳 페스트는 원래 아시아와 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풍토병이었다. 그러다 몽골 제국이 서방으로 진출하면서 유럽에 흑사병으로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1347년 몽골군은 크림반도의 항구 도시 카파를 공략했다. 공성전을 하며 흑사병으로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투석기를 이용해 성벽 안으로 날려 보냈다. 몽골군은 이미 중국에서 이 병으로 엄청난 사망자가 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곧 성 안에서 떼죽음이 발생했고 몽골군은 힘들이지 않고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 성에서 몇몇 이탈리아 상인들이 살아남아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흑사병이 유럽에 전파된 것이다.예상하지 않은 기회흑사병이 시작됐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피해는 더 심각했다. 중국에서는 유럽보다 더 많은 3300만 명이 사망했다. 아프리카에서도 흑사병의 피해는 극심했다. 이집트의 경우 19세기의 인구가 무려 1200년 전인 서기 7세기 인구의 3분의 1일 정도였다.흑사병의 피해가 이렇게 전 지구적이었는데도 유독 유럽의 흑사병만 화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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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노 박사의 시장경제 이야기 (11) 정부개입

    우리는 성공과 실패의 역사에서 수많은 교훈을 얻고 오늘을 살아갈 지혜를 깨우친다. 이는 경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메리 래시 보고서에 나오는 ‘벵갈 전원의 역사’는 우리에게 정부의 역할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논의의 필요성을 환기시킨다.벵갈의 사례에서 배우는 정부개입 실패1770년 남부 벵갈은 쌀 수확의 실패로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됐다. 당시 벵갈 정부는 곡식의 독점을 금지시켜 상인들의 쌀 투기를 막고 쌀의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처음에는 벵갈 정부의 정책이 유효하게 작용하는 듯했다. 곡물 가격이 급등하지 않고0.75펜스로 안정적인 가격을 유지한 것이다.그러나 국민들의 쌀 소비가 억제되지 않고 쌀 공급의 효율성이 떨어지면서 쌀 부족 현상이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되었다. 기근 후기에 이르러서는 곡물 가격이 지역에 따라 4펜스까지 폭등했고, 결국 인구의 30% 이상이 굶어 죽는 끔찍한 참사를 초래했다. 이렇게 벵갈 정부의 시장조정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그 뒤로 100년이 지난 1866년에 벵갈은 다시 한 번 기근이 발생,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되었다. 이때 벵갈 정부는 한 세기 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혀 다른 정책을 펼쳤다. 매점 행위를 통제하지 않고 모든 지역의 가격 변동을 매주 발표해 시장의 거래를 촉진시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선택과 경쟁이 동시에 작용하며 상대적으로 식량이 풍부한 지역에서 부족한 지역으로 식량의 이동이 활발해졌다. 쌀 공급과 소비가 효율적으로 탄력 있게 이루어졌고, 그 덕분에 가격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으며 기근 후기까지 대규모 아사와 같은 참사가벌어지지 않았다.가격 통제 않자 공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