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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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정부개입이 부른 '잃어버린 20년'…아베는 깨닫지 못했다
1985년 9월22일 미국 뉴욕에 있는 플라자호텔. 미국 영국 서독 프랑스 일본 등 이른바 경제 선진국 G5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이들은 미국 달러화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높이기로 합의했다. 유명한 플라자협정(Plaza Accord)이다.당시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의 3.5%에 달하는 심각한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실 경상수지 적자는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방만한 통화팽창으로 야기된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중앙은행(Fed)은 1980년대 들어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했다. 금리를 인상하자 미 달러화 가치가 크게 올랐다. 그 결과 글로벌시장에서 미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경상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 경상수지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참가국들이 달러가치를 떨어뜨리기로 합의한 것이다.플라자협정 이후 달러화 가치가 떨어지고 엔화 가치가 크게 오르기 시작했다. 엔·달러 환율은 1985년 달러당 260엔에서 1987년 123엔까지 상승했다. 엔화가치 상승으로 일본의 수출경쟁력이 약화돼 경제성장이 둔화될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저금리 정책으로 엔화가치 상승 효과를 상쇄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986년 1월부터 1987년 2월까지 재할인금리를 5%에서 2.5%로 낮추며 엔화를 풀었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통화량이 평균 10.5%씩 증가했다. 투자와 소비가 큰 폭으로 상승했고, 투자와 소비의 높은 성장세에 힘입어 1988년도 경제성장률이 7.1%를 기록했다. 대호황이었다.돈이 넘쳐났다. 가계와 기업은 낮은 금리로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아 주식과 부동산을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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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부실통계로 감춘 그리스 정부부채…EU위기 불 지폈다
2009년 10월4일, 그리스에 조기 총선이 실시돼 새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스 새 정부는 며칠 뒤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유럽연합(EU) 경제·재무장관회의에서 그리스의 재정적자가 당초 발표한 국내총생산(GDP)의 3.7% 수준보다 훨씬 많은 12.7%라고 발표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세수가 줄어든 데다 총선을 앞두고 재정 지출이 늘어났고 이전 정부가 심각한 재정적자를 은폐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리스 국가신용등급은 곧바로 떨어졌다. 처음엔 이것이 그리스만의 문제로 여겨졌다.시간이 지나면서 위기는 확산됐다. 공적연금과 임금을 줄이려는 그리스 정부의 개혁은 노조 등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투자자 신뢰를 잃었다. 유로존 정부 간 갈등으로 구제금융까지 지연되면서 그리스 국채 이자율은 상승했고 투자자들은 국채 상환불능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 부채가 많은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의 국채 이자율도 급등했다.국채 상환불능 우려는 이들 국가의 국채를 보유한 유로존 은행에 대한 신용 우려로 퍼져나갔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을 포함한 유로존 전체의 위기로 번지게 된 것이다.미국 의회조사처의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 재정위기의 근본 요인은 일부 유로존 국가들의 민간 및 정부 부채의 증가와 이를 가능케 한 국제금융환경이다. 기업과 마찬가지로 정부도 국채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다.이것이 꼭 나쁜 건 아니다.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는 건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 투자를 통해 경제가 성장하면 조세수입이 늘어나고 그래서 국채 이자 지급은 가능해진다. 경제 성장으로 경제 규모가 커지면 정부부채의 GDP 비중도 낮아진다. SOC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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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력 편차 큰 국가 통화 통합…PIIGS 도덕적 해이 불러
1999년 1월1일 유럽연합(EU)의 역사적인 통화 통합이 이뤄졌다. 독일, 프랑스 등 11개국이 단일 통화로 유로를 채택하고, 개별국의 중앙은행 대신 유럽중앙은행(ECB)이 통화정책을 수행하도록 했다. 1999년 출범 시에는 유로화가 금융회사 간 결제에만 사용되다가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민간의 실물거래에 통용됐다. 당초 11개 국가로 출범한 유로존은 2001년 그리스, 2007년 슬로베니아에 이어 2008년 사이프러스와 몰타, 2009년 슬로바키아, 2011년 에스토니아, 2014년에 라트비아가 가입해 현재 18개 국가로 구성돼 있다.EU가 유로를 출범시킨 명분은 유럽 내에서 같은 통화를 사용함으로써 개별 통화 간의 환전에 수반되는 거래비용과 헤징비용을 줄여 유럽인의 부와 소득을 증가시키기 위함이었다. 출범 당시 세계 각국은 대체로 유로의 탄생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유로가 달러에 대응하는 또 다른 기축통화가 된다면 국제 환율 안정에 기여할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경쟁이 일반재화의 품질을 제고하고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게 하듯이 통화도 경쟁을 해야 건실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통화보다는 복수의 통화가 기축통화로 사용되는 것이 훨씬 더 낫다.그러나 유로가 기축통화로 자리를 잡고 달러와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것은 전적으로 유로의 안정성에 달려 있다. 유로가 안정적인 가치를 유지해 기축통화로서 달러와 경쟁할 수 있다면, 기대한 대로 유럽인의 소득과 부는 증가할 것이고 국제 환율이 안정돼 세계 경제에 도움이 된다. 반대로 유로가 불안정해진다면 유럽 경제는 오히려 타격을 받고 세계 경제는 불안해진다.실제로 나타난 결과는 전자가 아닌 후자였다. 2008년 글로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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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통화팽창으로 경기부양?…日 장기불황 부른 케인스 이론
최근 일본은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 아베노믹스를 내세워 경제회복을 꾀하고 있다. 엔화 약세로 수출기업들이 활기를 되찾고, 장기간의 디플레이션에서 다소 벗어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본격적인 회복세에 들어섰다고 보긴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일본은 1990년대 초반 자산시장의 버블 붕괴 이후 20년여간 장기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90년 이전 40여년간 일본이 이룩한 경제적 성과는 대단했다. 1950년부터 1990년까지 일본 경제는 연평균 7%에 가까운 성장세를 보였다. 어떤 선진국도 20세기에 이런 성과를 보인 나라는 없었다. 1980년대 일본은 모든 신흥국들이 닮고 싶은 모델이었고, 미국에서 국수주의적인 보호무역이 나타나게 만든 나라이기도 했다.그러던 일본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20년 불황’에 빠지게 된 첫 번째 계기는 1985년의 플라자 합의였다. 미국이 재정·무역 쌍둥이 적자를 줄이기 위해 달러 강세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영국·독일·프랑스·일본의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 플라자 합의다. 이 결과 엔화 가치는 이후 3년간 50% 가까이 올라갔고 일본의 경제성장세는 꺾이기 시작했다. 문제를 키운 건 일본 정부의 대응이었다. 엔고로 인해 나빠진 경기를 회복시키기 위해 일본은행은 다섯 차례에 걸쳐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투자와 소비가 활성화되면서 1988년 7.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통화팽창 정책과 이에 따른 금융권의 경쟁적 대출은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가격을 가파르게 밀어올렸다. 일본 정부의 국토균형발전 정책이 더해져 부동산 붐이 전국으로 확산됐다.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자 일본 정부는 긴축통화 정책으로 급선회해 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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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빵을 달라" 글로벌 시위 화두는 민생…SNS 타고 빠르게 번졌다 쉽게 시들기도
인종도 지역도 경제 수준도 다른 국가들에서 적게는 수천명에서 많게는 수백만명이 거리로 나서고 있다. 과거엔 ‘민주화’ 등 거대 담론이 반정부 시위의 주제였지만 최근엔 대중교통요금 인하, 인프라 건설 요구 등 생활 밀착형 이슈가 많다. 한마디로 ‘민생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다. ○‘중산층의 반란’ 브라질에선 상파울루시(市) 정부의 버스요금 인상안에 항의하기 위한 시위가 시작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위대는 문제의 본질이 브라질의 부실한 교통 인프라에 있다는 것을 파악했고, 월드컵 경기장에만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불가리아도 마찬가지다. 재벌 언론인을 국가보안청장에 앉혔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결국 정부의 정실 위주 인사 시스템을 비난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이 같은 현상의 핵심에는 고학력 중산층과 경제난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중산층은 정부의 작은 부패에도 민감한 편이다.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서 이전보다 정부나 사회의 모순을 더 잘 파악하게 된 까닭이다. 운전면허증을 따기 위해 뇌물을 내야 하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중산층은 빈민층보다 시위할 시간도 많다. 미국의 유명한 사회학자 베링턴 무어가 “부르주아가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 스탠퍼드대 선임연구원도 “최근 정치적 소요들의 핵심에는 ‘글로벌 중산층’의 성장이 있다”고 설명했다. 아시아개발은행에 따르면 1990년 21%였던 아시아의 중산층(하루 소득 2~20달러)은 2008년 56%로 늘었다. 실제 브라질에선 최근 8년간 4000만명이 빈곤층에서 벗어났다. 터키에선 지난 10년간 대학 졸업자가 8%나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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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의 원천은 정부 아닌 시장"…덩샤오핑에도 한 수 가르쳐
○ 한국경제신문이 시대를 꿰뚫어본 경제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시리즈를 매주 토요일자에 게재합니다.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오늘날의 정치·경제적 현실과의 관련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경제사상의 흐름을 다양하게 살피기 위해 자유주의·반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삶을 함께 소개할 예정입니다.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자유의 대변인’이라고 칭송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오스트리아 빈대 법학부에 입학했다. 커리큘럼이 자유로워 법학은 물론 경제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공부할 수 있었다. 박사과정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청소년기에는 심정적 사회주의자였지만 은사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를 통해 확고한 자유주의가 된 하이에크는 경기변동이론부터 시작했다. 경기불황은 신용의 과잉팽창으로 야기된 인위적 붐의 불가피한 현상이며 왜곡된 생산구조가 정상화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할 과정인데, 이때 불황의 해법으로 정부지출이나 통화를 늘리면 그 과정이 치명적으로 방해받는다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에 공감한 런던대는 1931년 ‘케인스의 물결’(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이론)을 막기 위해 하이에크를 불렀다. 그러나 순수경제이론 연구는 하이에크에게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좁은 경제학으로는 이념 전쟁에서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데 불충분했다. 그의 경제학은 심리학 철학 법학 윤리학 등 학제융합적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심오하고 원대하다. 하이에크가 우리에게 준 자유주의 유산은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