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17)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에 의한 경기침체 살리려
일본은행, 5차례 금리인하

연쇄작용 생기며 버블 형성
긴축재정으로 급선회하자 금융부실·기업도산 이어져

유독 일본만 타격 컸던 이유는 시장원리 무시한 '정부실패' 탓
[세계 경제사] 통화팽창으로 경기부양?…日 장기불황 부른 케인스 이론
최근 일본은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 아베노믹스를 내세워 경제회복을 꾀하고 있다. 엔화 약세로 수출기업들이 활기를 되찾고, 장기간의 디플레이션에서 다소 벗어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본격적인 회복세에 들어섰다고 보긴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일본은 1990년대 초반 자산시장의 버블 붕괴 이후 20년여간 장기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90년 이전 40여년간 일본이 이룩한 경제적 성과는 대단했다. 1950년부터 1990년까지 일본 경제는 연평균 7%에 가까운 성장세를 보였다. 어떤 선진국도 20세기에 이런 성과를 보인 나라는 없었다. 1980년대 일본은 모든 신흥국들이 닮고 싶은 모델이었고, 미국에서 국수주의적인 보호무역이 나타나게 만든 나라이기도 했다.

그러던 일본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20년 불황’에 빠지게 된 첫 번째 계기는 1985년의 플라자 합의였다. 미국이 재정·무역 쌍둥이 적자를 줄이기 위해 달러 강세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영국·독일·프랑스·일본의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 플라자 합의다. 이 결과 엔화 가치는 이후 3년간 50% 가까이 올라갔고 일본의 경제성장세는 꺾이기 시작했다. 문제를 키운 건 일본 정부의 대응이었다. 엔고로 인해 나빠진 경기를 회복시키기 위해 일본은행은 다섯 차례에 걸쳐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투자와 소비가 활성화되면서 1988년 7.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통화팽창 정책과 이에 따른 금융권의 경쟁적 대출은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가격을 가파르게 밀어올렸다. 일본 정부의 국토균형발전 정책이 더해져 부동산 붐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자 일본 정부는 긴축통화 정책으로 급선회해 금리 인상 및 대출 규제에 나섰다. 종전과 정반대로 자산 버블이 꺼지면서 금융 부실과 기업 도산이 이어졌다. 일본 경제는 고베 대지진 직후 건설경기 회복과 고이즈미 내각의 개혁으로 잠시 살아나는 듯했으나 다시 침체 국면으로 들어가 지금까지 20년 넘게 불황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을 추월할 것 같던 일본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진 원인에 대한 시각은 다양하다. 플라자 합의를 비롯해 동아시아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대외여건의 악화가 결정적인 시기마다 나타나 경기회복에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정부의 위기대응 실패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대외여건의 악화가 불황의 단초를 제공한 건 분명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다는 게 필자의 분석이다. 플라자 합의도 마찬가지다. 이 합의로 엔화 가치가 급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달러 가치의 안정을 위해 이뤄진 이 합의는 엔화뿐만 아니라 독일 마르크화 등 주요 선진국 통화가치를 모두 끌어올렸다. 일본만의 경험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1990년대 후반 동아시아 외환위기나 이후 글로벌 정보기술(IT) 버블 붕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도 일본 경제에만 타격을 준 게 아니었다.

자산버블 붕괴로 시작된 일본의 장기 불황은 근본적으로 일본 정부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었다. 먼저 플라자 합의 이후 취한 통화팽창 정책이 대표적이다. 이는 저금리를 불러왔고 과오투자로 이어졌다. 계속된 금리 인하는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공격적인 대출에 나서게 했고 자연스레 신용이 낮은 기업에 대한 대출과 부동산 대출이 크게 늘어났다. 투자 붐도 조성됐다. 부동산과 주식 가격 상승은 기업들의 담보가치를 높여 대출은 더욱 더 늘어났으며, 시장에 풀린 자금은 다시 부동산 등에 대한 투자로 이어지는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자산버블이 손쓸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른 일본은 정반대 정책으로 전환을 시도했다. 긴축이었다. 주가에 이어 부동산 가격이 급락했다. 특히 부동산 값은 20년간 계속 하락했으며 이는 부실채권 증가와 금융부실로 이어졌다.

자산버블 붕괴와 금융부실 누적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재정지출을 늘려 경기를 부양하려는 확장적 재정정책이었다. 1992년부터 4년간 일본 정부는 여섯 차례에 걸쳐 65조5000억엔에 달하는 재정지출을 단행했다. 경기는 회복되지 않았고, 정부 부채만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은 버블 붕괴로 인해 빚어진 기업 및 금융회사 부실을 시장의 자연스러운 구조조정 기회로 삼았어야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에도 일본은 재정확대 정책을 지속해 부실기업과 한계기업을 존속시키며 불황을 키워갔다. 이는 1990년대 후반 마이너스 성장으로 나타났다.

[세계 경제사] 통화팽창으로 경기부양?…日 장기불황 부른 케인스 이론
자산버블 붕괴 이후 일본은행은 계속 초저금리를 유지했으나 경기침체 속에 물가가 오르는 디플레이션이 나타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2001년부터 더 공격적인 양적완화 정책을 취했다. 2006년까지 이어진 양적완화에도 불구하고 불황과 디플레이션은 해결되지 않았다. 부실 기업 및 금융회사가 상당수 존재하는 상황에서 시장친화적 구조개혁 없이 낮은 이자율과 유동성 공급을 통해 신용을 창출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오히려 불황을 심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정설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장기불황은 시장을 통한 부실기업 구조조정 없이 재정 및 통화 확대 정책을 통해 인위적 경기부양만을 시도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공공·금융개혁, 민영화 등 고이즈미 내각이 추진한 시장친화적 개혁이 지속되지 못한 것도 불황 지속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 정권의 포퓰리즘적인 복지 확대도 재정건전성만 악화시키고 불황을 심화시킨 정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송원근 <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