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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추덕영 한국경제신문 기자
그래픽=추덕영 한국경제신문 기자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전쟁으로 원유 수입에 차질이 생기면서 물가상승 압력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그 영향은 자동차 휘발유 가격에 그치지 않습니다. 쓰레기종량제봉투, 배달·포장 용기 같은 석유화학제품은 물론, 기저귀·통조림 등 생활필수품까지 사재기 현상이 번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불안 심리가 전쟁터 한가운데 선 듯합니다.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원유 정제 후 얻는 나프타(naphtha)는 합성수지의 원료로, 공급에 문제가 발생하면 병원 필수품인 수액백(輸液 bag)과 의약품 용기 생산도 불가능해집니다. 국민 건강과 생명 보호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죠. 비행기 연료인 항공유 가격도 전쟁 여파로 한 달 새 100% 이상 급등했습니다. 항공사들은 일부 노선 운항을 취소하기 시작했어요. 이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석유에 깊이 의존하고 있는지 총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생글생글은 지난 3월 2일 자(제932호) 커버스토리로 ‘전기(電氣) 국가’를 다뤘습니다. 그동안은 석유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한 나라가 세계를 지배했다면, 앞으로는 전기에너지의 공급 주도권을 쥔 나라가 부상할 것이란 요지의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는 다시 석유 시대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석유 경제는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됐고, 지금 세계는 어떻게 석유로 얽혀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과연 화석연료에 기반한 세계경제가 새로운 에너지에 길을 내어줄까요? 4·5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19~20세기 세계사를 움직인 동력
석유 없는 현대인의 삶, 가능할까?
 로이터연합뉴스
로이터연합뉴스
현대인은 온종일 석유 경제 속에서 살아갑니다. 아침에 깨어나면서 집어 드는 스마트폰 자체가 석유화학제품 덩어리입니다. 폴리카보네이트로 만든 케이스, 에폭시수지 원료의 내부 회로기판, 폴리머 필름으로 덮인 화면…. 욕실도 유화 제품으로 가득합니다. 계면활성제 원료의 비누, 나일론으로 만든 칫솔모, 폴리에틸렌 원료의 치약 튜브, 샴푸와 린스 용기 등이 모두 석유에서 나옵니다. 입는 것, 신는 것도 그렇습니다. 폴리에스테르, 나일론, 아크릴, 스판덱스 등 석유 기반의 합성섬유는 요즘 의류 원단의 60%를 차지합니다. 신발 밑창의 고무(합성고무), 방수 재킷의 코팅 소재도 모두 석유화학제품입니다.

석유는 ‘문명의 뼈대’

먹고 마시는 것도 석유와 연관돼 있습니다. 현대 농업에서 비료가 없으면 농사를 짓지 못합니다. 암모니아 합성의 질소비료는 그 원료가 천연가스 또는 석유입니다. 농약과 제초제도 석유화학 원료로 만들어지고 트랙터 등 농기계는 경유로 움직입니다. 식품 포장재는 폴리에틸렌 등이 원료이고, 합성 의약품의 원료도 석유화학 계통에서 나옵니다. 교통과 물류는 두말할 나위 없죠. 전 세계 수송 에너지의 약 90% 이상을 석유가 담당합니다. 석유는 단순한 연료가 아니라 ‘문명의 언어’이자 ‘현대문명의 뼈대’입니다.

석유 경제의 황금기와 도전

현대 석유산업은 고래기름을 대체할 등유를 확보하는 데에서 시작됐습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고래가 남획되면서 등불을 피울 연료가 모자랐습니다. 1859년 펜실베이니아주 땅을 파고 들어간 시추공이 검은 액체를 쏟아냈는데, 그게 석유였습니다. 이후 펜실베이니아 일대는 ‘오일 러시’의 현장이 됐습니다. 이때 스탠더드오일을 설립하고 1880년대 미국 정유산업의 90%를 장악한 인물이 바로 존 D. 록펠러입니다. 내연기관, 즉 자동차의 등장은 석유산업에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제1·2차 세계대전도 석유와 인연이 깊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석유의 전략적 가치를 세계에 증명한 전쟁이었습니다. 말(馬) 대신 석유 구동 전차와 트럭이 전장에 투입됐고, 항공기도 처음으로 군사적으로 사용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에너지 전쟁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코카서스 유전 확보가 핵심 목표였어요.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습격으로 촉발된 태평양전쟁은 1941년 미국의 대(對)일본 석유 금수 조치가 그 발단이었습니다.

1950~1960년대는 ‘석유 경제의 황금기’였습니다. 고속도로망이 미국 전역을 연결하고 부유층이 교외로 주거지를 옮기면서 자동차 문명이 꽃을 피운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석유 경제는 1973년 1차 오일쇼크와 1979년 2차 오일쇼크로 큰 위기를 맞습니다. 4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을 지원한 미국과 서방에 맞서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 금수 조치를 단행한 게 1차 쇼크를 불러왔습니다. 이란혁명으로 이란 석유생산이 중단된 것은 2차 쇼크의 원인이었죠. 1920년대 중동 석유가 발견되며 서구 열강과 이스라엘, 그리고 중동 국가 간 지정학적 갈등이 시작됐는데, 결국 오일쇼크라는 충돌 양상을 빚었습니다.

경제 시스템 좌우하는 석유

석유는 이후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핵심 축이 됩니다. 예를 들어, 오일쇼크는 세계에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인플레이션)이라는 새로운 경제 현상을 몰고 왔습니다. 경제학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하는 큰 변화였습니다. 석유는 국제 금융 질서와도 연결됩니다. 1971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금환본위제를 폐지해 달러를 더 이상 금으로 바꿔주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달러 인기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중대한 시점이었죠. 그 공백을 메꾼 게 1973~1974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간 협약이었습니다. 사우디가 석유 거래를 반드시 달러로만 결제하는 대신, 미국은 사우디 왕가의 안보를 보장하는 밀약이었습니다. 이로써 페트로달러 시스템이 등장합니다. 세계 모든 나라가 석유를 사려면 달러가 필요해졌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달러 패권의 핵심 기반이 되었습니다.NIE 포인트1. 미국 스탠더드오일이 왜 여러 석유 기업으로 분할됐는지 알아보자.

2. 1940년대 미국의 대(對)일본 석유 금수 조치가 왜 발동됐는지 공부해보자.

3. 석유산업과 관련된 경제용어나 경제 상식을 좀 더 찾아보자.유화제품 계통도, 석유경제 이해의 지름길
에너지원의 전환은 문명 자체를 바꾸는 일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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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정부는 원유를 정제해 얻는 나프타의 수출을 향후 5개월간 전면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우리나라는 석유는 수입하지만, 석유화학제품의 원료가 되는 나프타는 국내 생산량의 11%가량을 수출합니다. ‘원유 정제능력 세계 5위’의 경쟁력이라 할 수 있죠. 이 수출제한 조치가 왜 중요한지 이해하려면 석유의 정제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업의 쌀’ 수출국, 한국

나프타는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경유 등을 뽑을 때 함께 나오는 투명한 액체입니다. 이를 분해해 에틸렌·프로필렌·부타디엔·벤젠·톨루엔 등 기초 유분을 얻을 수 있죠. 기초 유분은 플라스틱·섬유·의약품 등의 원료가 됩니다. 예를 들어, 에틸렌은 폴리에틸렌(PE)과 폴리염화비닐(PVC)로 만들어져 플라스틱 생산에 투입됩니다. 프로필렌은 폴리프로필렌(PP)과 아크릴로 가공돼 섬유와 용기, 가전제품의 원료로 쓰입니다. 부타디엔은 합성고무, 벤젠은 합성섬유의 원료입니다. 이처럼 나프타는 ‘산업의 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비상 상황에서 정부가 물량 통제를 하는 겁니다.

메이저·OPEC의 ‘석유 정치’

다음으로 국제원유 시장을 움직이는 ‘큰손’들을 알아야 석유 경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엔 ‘석유메이저’라 불리는 거대 석유 자본과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있습니다. 석유메이저는 다른 말로 ‘세븐 시스터즈(Seven Sisters)’라고 합니다. 20세기 이후 세계 석유 생산의 85% 이상을 지배해온 석유 대기업이 엑슨모빌·셸·BP·토탈에너지·셰브론 등 7개로 압축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석유 시추에서 수송·정제·판매에 이르는 가치사슬(value chain)을 모두 장악하고 있습니다. 경영학에선 이를 ‘수직 통합(vertical integration)’ ‘수직 계열화’라고 하는데요, 이는 막강한 시장 지배력의 원천이 됩니다. 유가를 산유국이 아닌 이들 메이저가 정할 정도죠.

이른바 ‘석유 정치’가 벌어지는 곳은 산유국 협의기구 OPEC입니다. 자신들의 이해와 필요에 따라 석유 생산량을 조절하는데, 목소리를 단일하게 내지 못하는 게 취약점입니다. 같은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수니파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 종주국 이란은 OPEC 내에서 걸핏하면 대립합니다. 유가 급락을 막기 위해 감산(생산량 감축)에 합의할 때면 양국은 “왜 우리가 더 많이 줄여야 하느냐”며 으르렁거립니다. 사우디는 석유 시장 점유율을 지키려 하고, 이란은 서방의 제재로 억눌려 있는 원유 생산량을 회복하려 하기 때문이죠. 2016년 이후로는 러시아를 포함한 OPEC 플러스(+) 체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계 산유량의 약 40%를 조율합니다. 의견이 맞을 때도 있습니다. 2014년과 2020년 OPEC은 의도적으로 석유 생산량을 늘려 유가를 폭락시킵니다. 지하 암석에서 뽑아내는 셰일오일로 미국이 세계 1위 석유 생산국이 되자 미국 셰일오일 기업을 압박하기 위해 증산에 나선 겁니다. 이 여파로 2014년 당시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에서 30달러대까지 급락했습니다.

석유 경제의 전환, 가능할까

화석연료에 기반한 석유 경제가 이제 새로운 에너지원에 길을 내어줄 역사적 전환점을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동차를 전기차로 바꾸는 정도의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기존의 석유 경제는 에너지 기술의 발전, 자본의 독점, 전쟁의 촉발, 국가 간 밀약 등이 겹겹이 쌓여 형성된 결과물입니다. 에너지 전환은 단순한 연료 교체가 아니라, 문명을 떠받치는 소재·식량·금융·물류 시스템 전반을 다시 설계하는 일입니다. 현대를 ‘플라스틱 문명’이라고 할 정도인데요, 그렇다면 플라스틱을 무엇으로 대체해야 할까요? 석유 기반의 비료 없이 80억 세계 인구를 어떻게 먹일 수 있을까요? 페트로달러 이후 세계 금융 질서는 어떻게 재편될까요? 이런 과제까지 포함하는 에너지 전환은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 발 딛고 선 석유 경제를 먼저 잘 이해해야 하겠죠.NIE 포인트1. ‘석유 정치’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보자.

2.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이 구조조정 중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3. 미국·이란 전쟁이 석유 경제의 변화를 몰고 올까?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