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13세기 금속화폐 사용 본격화
中서 대규모 동전 들여와 교환수단 활용
품질 조악한 日동전…위조 쉬워 발행 중단
현금 직접 보내지 않는 송금시스템도 구축

상품경제 확산으로 생산방식 변화
비용 줄이고 염가품 대량 생산 확산
귀족 중심 제품서 서민 중심으로 이동
중세 일본에서 유통 화폐로 널리 쓰인 중국 북송(北宋)제작 동전.  위키피디아 제공
중세 일본에서 유통 화폐로 널리 쓰인 중국 북송(北宋)제작 동전. 위키피디아 제공
중세 일본에선 꽤 이른 시기부터 상품경제가 활성화됐다. 상품경제가 어느 정도로 원활하게 작동했는지는 당시 화폐 사용이 얼마나 활성화됐는지로 가늠할 수 있다. 중세 일본은 자체적으로 화폐를 주조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으로부터 대규모로 동전을 들여와 교환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일본에서 금속화폐 사용이 본격적으로 확대된 것은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때인 13세기다. 이 시기 일본에서 사용한 동전은 일본에서 주조한 것이 아닌 ‘중국 수입품’이었다. 고대 일본에선 ‘황조12전(皇朝十二錢)’이라고 불리는 여러 주화를 주조했다.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천황인 겐메이 덴노(元明天皇) 시절인 화동(和銅) 원년(708년)부터 헤이안 시대 무라카미 덴노(村上天皇) 때인 응화(應和) 3년(963년)까지 사용한 이들 12개 화폐는 품질이 열악해 위조가 손쉬웠다. 결국 율령제가 해체되면서 10세기부터 동전을 발행하지 않았다. 일본에선 쌀과 면, 포 등이 교환수단이 됐다.

동전이 교환수단으로 다시 부상한 것은 중국 북송(北宋)에서 대량으로 주조한 동전이 일본에 들어오면서다. 일본 내에서 ‘도래전(渡來錢)’, ‘송전(宋錢)’으로 불린 이들 화폐는 12세기에는 오늘날 차이나타운과 같은 당방(唐坊)을 중심으로 대량 유통됐다.

12세기 말기 일본 조정은 송전의 유통을 일시 금지했다. 하지만 이런 금령(禁令)은 사실상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13세기가 되면 화폐 유통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상품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그 유통수단으로 송전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송전은 가치 변동이 적었고, 쌀이나 직물처럼 품질이 불균질하거나 변질될 위험도 적었다. 안정적인 화폐로서 ‘송전’만 한 것이 없었다. 지역에서 중앙정부에 연공(年貢)을 바칠 때도 쌀에 비해 무게가 가벼워 장점이 많았다.

물론 쌀에 비해 가벼웠다는 것이지 동전도 대량으로 운송할 때는 문제가 많았다. 동전 1문(文, 1枚)은 약 4g으로, 1관문(貫文=7문)은 4kg에 이른다. 따라서 연공을 지급하기 위해 수십~수백 관문 단위로 돈을 운반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돈을 운반할 인력을 수소문해야 하는 데다 운반비도 적잖게 들었다.

그에 따라 일본 중세에선 ‘가에센(替錢)’이라고 불리는 현금을 직접 보내지 않는 송금 시스템이 구축됐다. 이와 함께 ‘사이후(割符)’라는 어음이 있어서 ‘사이후’ 한 개가 10관문으로 정형화된 형태로 송금에 사용된 뒤 수령자가 현지에서 환전하거나, 별개의 송금을 2~3회 쓰이기도 했다. 결국 도래전은 13세기 전반기가 되면 면포의 교환 기능을 대체했고, 14세기 초에는 물건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로 사용하게 된다.

활발한 금속화폐 거래는 상품시장의 등장도 자극했다. 중세 일본에서 대량의 상품 소비지인 교토(京都)를 겨냥한 각종 상품이 등장했고, 유통이 활발해졌다. 자연스럽게 거래 수단으로 도래전이 널리 쓰였다.

실제 ‘상품경제’의 등장은 일본 내 제품 생산 방식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했을 때 큰 변화가 일어난 것도 생산 방식이었다. 가마쿠라의 특산품이던 화려한 문양의 칠기인 ‘형압칠회(型押漆繪)’는 자취를 감췄다. 14세기 중기 이후로는 오륜탑(五輪塔)과 보협인탑(宝篋印塔)을 비롯해 각종 판비(板碑)도 소형화되고 모양새가 거칠어졌다. 도자기도 고세토(古瀬戶) 도기와 고급 도자기 모조품에서 일상생활 도구로 생산의 중심이 옮겨졌다. 도자기 제작 기술 면에서도 시유(施釉, 도자기를 만들 때 잿물을 바르는 일) 방법이 솔로 잿물을 칠하는 것에서 도기를 잿물에 담그는 식으로 바뀌었다.

모두 제품 제작 비용을 절감하고 양산화한다는 뚜렷한 방향성은 보였다. 중앙 귀족의 가신인 ‘가마쿠라 어가인(御家人)’이라는 안정적인 고객을 잃은 생산자는 그보다 경제력이 취약한 도시 주민이나 촌락 상층민을 새로운 판매 대상으로 삼아 염가품을 대량 생산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방향성은 15세기에 들어가면 더욱 분명해졌다. 큰 톱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이용해 통나무를 각재나 판재로 쉽게, 낭비 없이 취할 수 있게 되면서 양산화가 시작됐다. 기존 대패보다 쉽게 표면을 매끄럽게 가공할 수 있는 신형 대패의 도입으로 얇은 판의 측면을 정밀하게 가공하는 작업이 쉬워지면서 양산된 목제 용기 보급이 비약적으로 늘었다.

같은 시기에 오다와라(小田原)의 석공은 중세 전기처럼 우수하고 균일한 품질의 석재를 하코네(箱根) 산중에서 채취하는 대신 오다와라 근처의 하구까지 강을 타고 옮겨 온 전석(轉石)을 이용하는 것으로 비용을 낮췄다. 기존에 정성 들여 예술 작품처럼 만들던 오륜탑(五輪塔)과 보협인탑(宝篋印塔), 돌절구(石臼)도 양산품이 되기 시작했다. 15세기가 되면 가마쿠라 및 가마쿠라와 관계가 깊은 지역에서 하코네의 안산암을 활용한 대형 오륜탑과 보협인탑을 제작하던 석공 집단이 넓은 지역으로 퍼져 현지의 석재를 이용한 제품을 주문 생산하기 시작했다.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중국산 화폐가 키운 중세 일본의 상품시장
14세기 후반에 기존 기술 범위 내에서 새로운 타깃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뒀다. 15세기에도 이런 추세가 이어졌다. 이후 새로운 도구와 기법을 수용한 기술 혁신으로 양산화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다.

생산 스타일의 변화는 유통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가마쿠라 어가인 등 각지의 영주 대신에 촌락 상층민까지 넓은 층을 판매 대상으로 삼으면서 생산지의 범위도 넓어지고 상품의 지역적 유통권도 교토와 가마쿠라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역까지 널리 확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