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서진규 < 다시,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

삶을 에세이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 20년 넘게 큰 반향을 일으키는 비결은 뭘까. 책 제목대로 저자가 많은 사람의 가슴에 ‘희망의 증거’가 되어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리라. ‘흙수저’보다 더 낮은 ‘진흙바닥 수저’라고 자신을 규정한 서진규 저자의 삶은 어떻게 수많은 이의 희망으로 떠올랐을까.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죽을 각오'로 희망을 향해 돌진한 女전사](https://img.hankyung.com/photo/202411/AA.38631287.1.jpg)
2년 만에 나온 비자를 손에 쥐고 1971년 미국으로 떠난 그는 타고난 성품대로 성실히 일하다 첫눈에 반한 남자와 결혼한다. 하지만 무능력한 데다 네 살 난 딸이 있던 남자는 폭력적이었다. 그런 남자를 피해 도피처로 선택한 것은 군 입대였다.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유능한 아내를 돕지는 못할망정 열등감을 느껴 자주 분노하고 손찌검한 그 남자와는 결국 이혼했다.최우수 미군이 되다서진규의 진가는 1976년 28세의 나이로 미군에 입대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키 큰 미국 남성들과 똑같은 훈련을 받는 일이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차별 앞에서 좌절하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그 사명감은 어디로 간 거야? 네 꿈을, 희망을 증명하겠다고 했잖아’라며 자신을 다그치며 수련한 끝에 그는 최우수 훈련병이 된다. 보급 주특기 훈련 15개 과목에서 전부 만점을 받으며 최고 우등생이 된 그의 첫 부임지는 서울이었다.
도전을 멈추지 않는 서진규는 최고령 후보생으로 간부에 지원, 혹독한 훈련을 거쳐 1981년 미 육군 소위가 된다. 50명이 참가한 병참 장교 주특기 교육 과정에서 악착같이 노력해 일등상과 최우수 지도자상을 받았고, 한국 출신 여성 최초로 일반 중대 중대장이 되었다. 두 아이를 낳은 여성이 10세 이상 어린 젊은 군인들과 경쟁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는 반드시 해낸다는 각오로 혼신을 다해 최우등 행진을 이어갔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대학에 등록한 그는 지역을 옮길 때마다 대학도 옮겨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 용산에 있는 메릴랜드 대학교 분교에서 졸업장을 받았다. 첫 대학 등록 이후 14년 만에 다섯 번째 대학에서 학사 졸업장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유능한 동북아시아 지역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에 지원하여 석사과정에도 합격했다. 42세에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하버드의 공붓벌레들과 경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한국 여자는 정말 무섭도록 강하구나”라는 소리를 들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인생에 순응하지 마라1992년 32명의 지원자 가운데 단 2명이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국제외교사 동양사언어학과’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그중 한 사람이 서진규였다. 하지만 미군 장교 역할과 박사과정을 병행하기 힘들어 고심 끝에 하버드를 택한 그는 1996년에 소령으로 예편했다.
그리고 박사과정을 밟는 중에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를 펴냈는데 곧바로 밀려든 방송 출연과 강연 요청으로 서진규는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었고, 자신의 바람대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었다. 그는 다시 쓴 서문에서 “나는 스스로 내 인생을 정복했다”고 말하며 독자에게 “인생에 순응하지 마라. 내가 가진 것을 십분 활용하고, 분노가 필요하면 분노를 에너지 삼아 원하는 것을 얻어라”라고 권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