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을 온라인에 올리곤 합니다. 실생활에서는 주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온라인 공간에선 자신을 활짝 드러내는 이도 많죠. 디지털 시대 네트워킹의 달라진 단면인데요, SNS에 등장하는 유명인이나 인플루언서의 이런 일상이 ‘힙(hip)하다(멋지다)’ 싶으면 너도나도 따라 하는 게 유행이 됐습니다.최근엔 ‘글을 읽는 것이 멋지다’는 뜻의 ‘텍스트 힙(text hip)’ 흐름이 세계 각국의 Z세대를 중심으로 급속히 퍼지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책의 멋진 구절이나 표지, 자신의 서가 등을 찍어 공유합니다. 기분이 좋을 때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 물질인 도파민이 독서할 때 많이 나온다는 뜻에서 ‘독(讀)파민’이란 신조어도 등장했습니다. 책과 글이 쇼츠(짧은 동영상) 인기에 자리를 내준 것 같았는데, 정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도 ‘텍스트 힙’ 확산의 불쏘시개가 되고 있습니다. 매년 축소되던 국내 출판 시장이 10년 만의 독서 열풍에 다시 기지개를 켠다고 하니 참 반갑습니다.
이런 텍스트 힙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독서 열풍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궁금해집니다. 나아가 인공지능(AI) 시대에 책 읽기의 의미와 독서량이 많은 나라는 어떤 점에서 차별점을 보이는지도 흥미롭습니다. 이어지는 4·5면에서 두루 살펴보겠습니다.독서는 자신을 차별화하는 멋진 수단
짧은 영상 시대에 텍스트 오히려 인기죠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국내 출판계 불황을 역대급 호황으로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한강의 소설은 노벨상 수상 발표 이후 100만 부 넘게 팔리며 ‘독서의 귀환’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조짐은 벌써부터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6월 말 폐막한 서울국제도서전의 관람객 수가 하나의 예인데요, 작년의 13만 명보다 15%가량 많은 15만 명이 도서전을 찾았습니다. 도서 판매율도 늘고 있습니다. 올 2분기 국내 가구(1인 이상)의 서적 구입비는 월평균 9272원으로 집계됐습니다. 코로나19가 발발한 2020년 2분기(1만1227원)보다 낮지만, 작년 2분기(8077원)보다는 늘어난 수치입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패션 등 생활 분야로도 확산하고 있습니다. 책을 몇 권씩 넣을 수 있는 빅백(big bag)의 유행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죠. 읽고 기록하는 행위가 멋지다는 것을 의미하는 ‘텍스트 힙’이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 이전부터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겁니다.
쇼츠 전성시대에 ‘힙’해진 독서
텍스트 힙은 올 초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독서는 섹시해(Reading is Sexy)’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세대가 종이책을 읽는 문화가 생겨나고 있다는 게 기사의 요지입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건 없지만, 올해 국내에서도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예로 든 서울국제도서전의 주 관람객은 2030세대로, 전체 관람객의 70~80%를 차지했습니다. 책을 안 읽어 문해력이 모자란다는 지적을 받은 Z세대가 도서전에 열광한 겁니다. 지금은 짧은 영상이 지배하는 ‘쇼츠 전성시대’인데, 긴 글이 다시 관심을 집중시킨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러면 텍스트 힙이 본격화한 이유는 뭘까요? 먼저 Z세대의 특성 때문으로 볼 수 있어요. 자신을 다른 사람과 차별화하는 수단으로 책에 주목하는 겁니다. 독서가 지루하고 따분할지 몰라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취미라는 생각, 그런 취미를 내가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텍스트 힙으로 이끄는 것이죠. 이들은 책을 읽는 데서 끝나지 않아요. 온라인에 독서 인증 샷을 올리고 글을 포스팅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죠. Z세대는 이미지만 갈구하지 않고 텍스트를 곁들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진 중심의 인스타그램에 텍스트를 가미한 인스타 매거진이 인기를 끄는 현상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인스타그램에서 ‘#북스타그램’을 검색하면 게시물만 600만 건 넘게 나옵니다. 책을 밀어내던 SNS가 공교롭게도 독서를 권장하는 매체가 되고 있는 셈이죠. 인터넷 속 범람하는 이미지, 알고리즘을 통해 쏟아지는 콘텐츠 속에서 피난처를 찾고 휴식하려는 욕구가 책을 다시 가까이하게 만든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웹툰도 텍스트로 보는 Z세대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 독서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성인의 독서량은 계속해서 줄고 있습니다. 국민 독서 실태는 정부가 2년에 한 번씩 조사하는데요, 2023년 조사에서 성인의 종합 독서율은 43%로, 1994년 조사 이래 최저치를 보였습니다. 연간 종합 독서율이란 최근 1년간 교과서나 학습참고서, 수험서, 잡지, 만화 등을 제외한 일반 도서를 한 권 이상 읽은 사람의 비율을 말합니다. 일반 도서란 종이책과 전자책, 오디오북을 모두 합친 겁니다. 이를 합산한 종합 독서량은 연 3.9권으로, 2021년 조사 때에 비해 0.6권 줄었습니다. 이렇게 바뀐 게 없는데 ‘독서 열풍’ ‘텍스트 힙’을 얘기하니 의아스럽긴 합니다.
힌트는 실태조사 내용 중에 있습니다. 응답자들은 종이신문과 잡지, 인터넷신문은 물론 블로그, 만화책(웹툰 포함), SNS의 글, 북튜브(책 유튜브), 인터넷 검색 결과 등을 읽어도 독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독서율은 감소하는데 텍스트 힙이 유행하는 것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독서라고 생각하는 매체의 범위가 이처럼 늘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에 인쇄된 글자뿐 아니라 스크린에 비치는 텍스트도 이들에겐 똑같은 텍스트인 것이죠. NIE 포인트1. 청소년도 독서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는지 친구들과 얘기해보자.
2. 웹툰을 보는 행위도 독서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3. ‘텍스트 힙’이 일시적 유행에 그칠지, 아니면 오래 지속될지 어떻게 생각하는가?AI에만 의존하는 '읽기', 사고력 저하시켜
국민 독서량은 경제발전과 연관성 높아 유튜브는 물론 생성형 AI같이 ‘읽기’를 돕는 수단이 속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온라인상에선 각종 정보를 쉽고도 압축적으로 전달해주는, 달리 표현하면 만두처럼 한입에 쏙 넣을 수 있는 지식 콘텐츠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길어봐야 20분 안팎의 영상 콘텐츠들이 고전처럼 두껍고 어려운 책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책 외에도 읽을 수 있는 매체가 다양하게 등장하면서 ‘읽는다’는 행위의 의미가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스낵’ 같은 지식, 문해력 방해
온라인 지식 콘텐츠는 종이책의 대체재라 볼 수 있습니다. 유튜버들이 새로운 지식 보따리장수가 되고, 이들이 가공한 지식은 마치 스낵처럼 손쉽게 소비됩니다. ‘지식의 스낵화’란 말이 등장한 것도 그래서죠. 이런 콘텐츠를 젊은 세대가 많이 읽다 보니 전통적 의미의 독서 행태도 바뀌고 ‘텍스트 힙’이 확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콘텐츠들이 종이책의 대체재가 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까요? 인쇄된 책의 글자와 스크린의 글자는 읽기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온라인 콘텐츠는 대충 훑어보거나 건너뛰는 식으로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이 큰 그림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생각하며 읽는 경우는 적죠. 전통적 독서는 책을 읽으며 사고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스크린에 잘 정리된 콘텐츠는 이런 과정 없이 덥석 받아들이게 됩니다.
AI가 정리한 글을 스크린으로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성형 AI는 자신이 먼저 방대한 분량을 학습하고 대화를 통해 답을 제공합니다. 필요한 정보를 모아 정리하는 과업을 AI에 맡겨버린 사람은 몸은 편할지 몰라도 자기 머리로 이해하고 정리해내는 능력은 썩히게 됩니다. AI에게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떻게 대화를 풀어가느냐는 것은 사람의 역할입니다. 따라서 ‘질문하는 사람’, 이른바 호모 프롬프트(Homo Prompt)의 역량이 AI 시대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AI를 독서의 대체재로만 이용하면 이런 능력을 기르기 어렵습니다. AI 기술은 사람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도와주지만, 사람의 ‘제대로 된 읽기’를 방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독서는 혁신으로 이끄는 문(門)
흔히 독서율이 높은 국가가 선진국에 이른다고 합니다. 독서가 국민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볼까요? 일반적으로 독서는 다른 사람의 경험이나 성공 사례 등을 간접 경험하게 해줍니다. 그러면 인적자본(human capital) 축적이 늘어나고 인적자본의 질도 높아질 수 있죠. 이를 통해 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만들어집니다.
물론 교육도 인적자본의 축적과 질 제고에 지대한 역할을 합니다. 근로자의 노동생산성을 높여 기존 생산방식의 효율성을 개선시켜주죠. 이에 비해 독서는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길러줘 생산방식 자체를 혁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조지프 슘페터가 기업가정신의 핵심으로 강조한 ‘창조적 파괴’는 굳이 비교하자면 교육보다 독서를 통해 길러질 수 있습니다.
경제학에선 독서량이 많은 나라의 경제가 더 발전한다는 식의 직접적 인과관계를 밝히는 연구는 많지 않습니다. 계량화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한 나라의 경제발전 수준을 보여주는 요소와 독서량의 상관관계를 보여줄 순 있습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2016년에 내놓은 ‘독서의 경제적 영향’이란 분석 글은 그런 부분에 주목했습니다. 당시 유럽 국가와 한국의 데이터를 비교했을 때 독서 정도를 나타내는 독서율과 국가별 소득수준 간에는 0.58이란 높은 상관관계를 보였습니다. 상관계수는 0부터 1 사이 값을 갖는데, 1에 가까울수록 연관성이 높습니다. 독서율과 국가별 경쟁력 지수(Global Competitive Index, 세계경제포럼 발표) 간엔 0.77, 독서율과 혁신성 지수(Innovation Index, 세계경제포럼) 간엔 0.72, 기업가정신과는 0.81이라는 높은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회청결도 지수(Corruption Perception Index)도 0.73이란 상관관계를 나타냈습니다. 독서량이 많은 나라는 대개 우수한 경제지표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NIE 포인트1. 책을 읽을 때와 각종 지식 콘텐츠를 볼 때 어떤 점이 다른가?
2. 교육과 독서의 기능과 효과를 비교해보자.
3. 독서량이 많은 나라의 국민소득은 어떤지 직접 파악해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