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폐에는 조선시대 인물뿐이다. 1000원권 이황, 5000원권 이이, 1만원권 세종, 5만원권 신사임당이다. 유학자 아니면 왕, 5만원권에 여성이 한 명 포함됐다. 근대 인물이나 대한민국을 세운 현대 인물은 없다. 최근 일본에서 경기 활성화 등을 이유로 새 지폐 3종을 발행했는데, 화폐 속 등장인물이 화제가 됐다. 1000엔권엔 의학자, 5000엔권엔 여성 교육자, 최고액 1만엔에는 기업인을 넣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도 화폐의 인물을 다양화하고, 특히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기업인을 등장시키자는 주장이 나왔다. 여기에는 화폐야말로 경제의 상징이라는 점, 돈에 대한 일각의 부정적 시각을 떨쳐 경제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자는 함의가 있다. 하지만 가뜩이나 논란 많은 한국 사회에서 평지풍파만 일으킬 것이라는 우려도 없지 않다. [찬성] 화폐는 국가·경제·발전·성장 상징…과거 조선시대 인물 일색은 곤란한 나라의 화폐는 국기와 국가 다음으로 중요한 국가의 상징이다. 독립국가의 경제주권을 보여주는 최상의 신뢰 시스템이기도 하다. 모든 나라가 고유의 지폐와 주화를 만들어 화폐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경제발전을 도모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화폐에는 현대 한국의 인물이나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인물이 없다. 모두 조선시대 사람뿐이다. 전근대 왕조인 조선은 대한민국과 직접 연관 있는 국가가 아니다.
모두 조선시대 인물만 등장시킨 화폐로는 대한민국이 어떤 국가, 어떠한 경제를 지향하는지 알 수가 없다. 굳이 경제발전이 아니더라도 국가와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담을 필요가 있는데, 지금처럼 유학자나 그 가족 중심의 등장인물은 그런 가치를 해내기 어렵다. 여러 나라의 공동 화폐인 유로화는 아예 인물을 삽입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지폐에는 그 나라의 국부(國父)나 독립·건국 영웅이 등장한다. 미국 달러의 경우 가장 많이 사용되는 10달러 지폐에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최고액권인 100달러 지폐에는 독립의 큰 공신이자 과학자인 밴저민 프랭클린의 얼굴이 담겨 있다. 나머지는 역대 대통령들이다. 한국과 대조적이다.
2024년 7월 일본은 경기 활성화 등을 위해 새 지폐 3종을 발행했다. 1000엔권은 파상풍균 배양에 성공한 의학자, 5000엔권은 일본 최초의 여성 해외 유학생이었던 교육자, 1만엔권은 은행과 기업 등을 세워 일본 경제를 키우며 사회사업 등을 병행한 기업인이다.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한 국가가 어떤 가치에 비중을 두는지 짐작할 만하다. 일본의 선택이 정답은 아니지만 우리도 좀 더 진취적으로 접근할 때가 됐다. 화폐는 외국인도 본다.
한국처럼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면서 개방과 자유로운 교역·투자로 살아가는 나라라면 그에 걸맞은 가치를 지향하고, 화폐도 그래야 한다. 신권을 만들거나 고액권을 발행할 때 기업가 등 진취적 인물을 담아야 한다. [반대] 평지풍파 예상, 배금주의 부추길 우려…인물 배제하고 '통합 상징물'로 해야지금 한국은 과도하게 분열돼 있다. 정치적 성향과 사회를 보는 관점에 따라 사사건건 진영 논리가 판치고 극한적 대립이 반복되고 있다. 국가 전체가 ‘정치 과잉의 사회’가 되어버렸다. 굳이 선거 때가 아니더라도 진영 논리가 판친다. 이런 판에 국민 모두가 한마디씩 할 수 있는 화폐의 도안 문제가 사회적 논쟁거리로 부각되면 차분하고 의미 있는 토론이 가능할까. 대한민국 건국과 이후 경제발전에 기여한 인물이 적지 않지만, 발자취가 있는 인사에 대해서도 찬반 논란이 이어지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가령 건국 과정에서도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판에 누구를 택한들 반대 그룹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는 정치적 인물에 국한한 문제가 아니다. 과학자나 교육자의 경우에도 진영 논리에 따라 추종 그룹과 배타적 세력이 필연적으로 생긴다. 이런 대립과 논란은 종교계나 문화예술계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교육·종교·언론계에서도 정치적 좌우보혁의 논리나 입장이 앞서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공론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경제계 인물로 기업인을 선정한다고 해도 삼성(이병철)·현대(정주영) 등을 비롯해 LG·SK·유한양행·두산 등 의미 있는 기업의 창업주가 많은 데 누구를 무난하게 정할 수 있을까. 지금 한국 사회는 그럴 만한 여유와 이성이 없다.
다만 지폐에 위조 방지 기술을 보강할 필요성은 있을 수 있다. 신권 발행에 따른 경기 자극 효과도 기대할 만하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국가 통합의 문양이나 국보급 문화재를 담는 게 차라리 낫다. 아니면 일부 국가 화폐처럼 한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명승이나 수려한 산수 풍경을 담는 게 나을 수 있다. 신용 결제가 급증하고 화폐가 디지털화되면서 지폐의 쓰임새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이런 일로 논란거리를 보탤 필요가 없다. 유학과 관련됐지만 현재 화폐에 담긴 조선시대 인물은 무난한 편이다. √ 생각하기 - 돈은 최상의 신뢰시스템…'건설적 시대정신' 반영 필요 국가는 다양한 신뢰 체계를 구축한다. 세제·교육·보건·사법·국방 등 많은 신뢰 시스템 중 최상이 화폐 제도다. 이는 대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평가다. 종이 한 장이 모든 사적·공적 거래에 따른 채권·채무를 담보하고 해소하는 것은 나라가 보증하기 때문이다. 금본위제가 아닌데도 화폐가 통용되는 것도 그래서다. 지폐든 동전이든 화폐는 그 자체로 국가의 상징이다. 국민 모두가 돈의 의미와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생에겐 경제 교육도 필요하다. 국가의 가치, 미래 발전의 지향점을 자연스럽게 담아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조선시대 인물 일색으로 모자(母子)가 나란히 등장한 게 잘된 것인지, 원점에서 재평가해볼 때가 됐다. 그런 점에서 기업인·기술·과학자를 등장시키는 화폐도 의미가 있다. 문제는 이로 인해 발생될 논란을 우리 사회가 극복하고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느냐다. 1만·5만원 사이 3만원권과 고물가를 반영해 10만원 발행도 생각해볼 만하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수석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모두 조선시대 인물만 등장시킨 화폐로는 대한민국이 어떤 국가, 어떠한 경제를 지향하는지 알 수가 없다. 굳이 경제발전이 아니더라도 국가와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담을 필요가 있는데, 지금처럼 유학자나 그 가족 중심의 등장인물은 그런 가치를 해내기 어렵다. 여러 나라의 공동 화폐인 유로화는 아예 인물을 삽입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지폐에는 그 나라의 국부(國父)나 독립·건국 영웅이 등장한다. 미국 달러의 경우 가장 많이 사용되는 10달러 지폐에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최고액권인 100달러 지폐에는 독립의 큰 공신이자 과학자인 밴저민 프랭클린의 얼굴이 담겨 있다. 나머지는 역대 대통령들이다. 한국과 대조적이다.
2024년 7월 일본은 경기 활성화 등을 위해 새 지폐 3종을 발행했다. 1000엔권은 파상풍균 배양에 성공한 의학자, 5000엔권은 일본 최초의 여성 해외 유학생이었던 교육자, 1만엔권은 은행과 기업 등을 세워 일본 경제를 키우며 사회사업 등을 병행한 기업인이다.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한 국가가 어떤 가치에 비중을 두는지 짐작할 만하다. 일본의 선택이 정답은 아니지만 우리도 좀 더 진취적으로 접근할 때가 됐다. 화폐는 외국인도 본다.
한국처럼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면서 개방과 자유로운 교역·투자로 살아가는 나라라면 그에 걸맞은 가치를 지향하고, 화폐도 그래야 한다. 신권을 만들거나 고액권을 발행할 때 기업가 등 진취적 인물을 담아야 한다. [반대] 평지풍파 예상, 배금주의 부추길 우려…인물 배제하고 '통합 상징물'로 해야지금 한국은 과도하게 분열돼 있다. 정치적 성향과 사회를 보는 관점에 따라 사사건건 진영 논리가 판치고 극한적 대립이 반복되고 있다. 국가 전체가 ‘정치 과잉의 사회’가 되어버렸다. 굳이 선거 때가 아니더라도 진영 논리가 판친다. 이런 판에 국민 모두가 한마디씩 할 수 있는 화폐의 도안 문제가 사회적 논쟁거리로 부각되면 차분하고 의미 있는 토론이 가능할까. 대한민국 건국과 이후 경제발전에 기여한 인물이 적지 않지만, 발자취가 있는 인사에 대해서도 찬반 논란이 이어지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가령 건국 과정에서도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판에 누구를 택한들 반대 그룹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는 정치적 인물에 국한한 문제가 아니다. 과학자나 교육자의 경우에도 진영 논리에 따라 추종 그룹과 배타적 세력이 필연적으로 생긴다. 이런 대립과 논란은 종교계나 문화예술계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교육·종교·언론계에서도 정치적 좌우보혁의 논리나 입장이 앞서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공론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경제계 인물로 기업인을 선정한다고 해도 삼성(이병철)·현대(정주영) 등을 비롯해 LG·SK·유한양행·두산 등 의미 있는 기업의 창업주가 많은 데 누구를 무난하게 정할 수 있을까. 지금 한국 사회는 그럴 만한 여유와 이성이 없다.
다만 지폐에 위조 방지 기술을 보강할 필요성은 있을 수 있다. 신권 발행에 따른 경기 자극 효과도 기대할 만하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국가 통합의 문양이나 국보급 문화재를 담는 게 차라리 낫다. 아니면 일부 국가 화폐처럼 한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명승이나 수려한 산수 풍경을 담는 게 나을 수 있다. 신용 결제가 급증하고 화폐가 디지털화되면서 지폐의 쓰임새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이런 일로 논란거리를 보탤 필요가 없다. 유학과 관련됐지만 현재 화폐에 담긴 조선시대 인물은 무난한 편이다. √ 생각하기 - 돈은 최상의 신뢰시스템…'건설적 시대정신' 반영 필요 국가는 다양한 신뢰 체계를 구축한다. 세제·교육·보건·사법·국방 등 많은 신뢰 시스템 중 최상이 화폐 제도다. 이는 대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평가다. 종이 한 장이 모든 사적·공적 거래에 따른 채권·채무를 담보하고 해소하는 것은 나라가 보증하기 때문이다. 금본위제가 아닌데도 화폐가 통용되는 것도 그래서다. 지폐든 동전이든 화폐는 그 자체로 국가의 상징이다. 국민 모두가 돈의 의미와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생에겐 경제 교육도 필요하다. 국가의 가치, 미래 발전의 지향점을 자연스럽게 담아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조선시대 인물 일색으로 모자(母子)가 나란히 등장한 게 잘된 것인지, 원점에서 재평가해볼 때가 됐다. 그런 점에서 기업인·기술·과학자를 등장시키는 화폐도 의미가 있다. 문제는 이로 인해 발생될 논란을 우리 사회가 극복하고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느냐다. 1만·5만원 사이 3만원권과 고물가를 반영해 10만원 발행도 생각해볼 만하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수석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