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인간은 왜 전쟁할까

세상 질서 바꾸는 것이 목표인 사람
'희망'이라는 단어로 포장해 선동

냉전 시기 형편 어렵던 소련
동맹국 큰형 체면 지키려 전쟁도

전쟁은 노인이 결정하고, 젊은이가 싸우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피해를 봐
쑥쑥 늘어난 이스라엘의 영토는 그 세월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흘린 눈물과 한숨이다. 왼쪽 두 번째 지도는 ‘부동산 업자’ 유엔의 ‘제안’이었을 뿐, 이런 지도가 현실에서 그려진 적은 없다.
쑥쑥 늘어난 이스라엘의 영토는 그 세월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흘린 눈물과 한숨이다. 왼쪽 두 번째 지도는 ‘부동산 업자’ 유엔의 ‘제안’이었을 뿐, 이런 지도가 현실에서 그려진 적은 없다.
인간은 왜 전쟁할까. ‘그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인간이 전쟁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별 이득도 없는데 그 일을 반복해서 한다면 그건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말 말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꽤 괜찮은 전쟁 서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도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전쟁이 그다지 싫지 않은 젊은이들.” 체험은 없고 기억은 영광에만 집중된, 전쟁 다음 세대가 팔다리가 떨어져나가는 고통과 어미들의 탄식이 잊힐 무렵 기꺼이 전쟁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분쟁의 역사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는 반드시 호전적인 인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세상의 질서를 바꾸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며 교묘한 선동으로 그가 바꾸려는 질서가 얼마나 이익인지를 ‘희망’이라는 단어로 포장한다. 물론 이들은 옆집 김 씨나 회사 박 부장 같은 범인(凡人)이 아니다. 대부분 정치가와 군인이 직업인 이들은 인간을 지배하는 일에 쾌감을 느끼는 야심가들이다. 그럼 남자만? 야심이 성별을 가려가며 깃들 리 없다. 원폭 실험을 강행한 인도 총리도, 중동전쟁에서 한때 원자폭탄 사용을 결정한 이스라엘 총리도, 포클랜드전쟁을 강행한 영국 총리도 모두 여자였다. 이 야심가들에게는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큰 의미가 없다. 이들은 모두 ‘전쟁형 인간’이다. 그리고 이들이 벌인 전쟁은 전부 ‘개인적 의지’가 발휘된 결과였다. 이게 ‘그 책’이 설명하는 인간이 전쟁하는 이유다. 자, 그럼 실전 문제. 한국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간단하다. 김일성의 의지다. 그의 개인적 의지가 3년 1개월 동안 한반도를 피비린내에 잠기게 했다. 한민족 최고의 인물을 가리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5000년 역사 최고의 역적을 고르는 일은 너무나 쉽다. 김일성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떨까. 도발한 것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이다. 서방의 군사적 동진(東進)은 러시아로선 뼈에 새겨진 공포다. 1812년 나폴레옹이 쳐들어왔고, 100년 좀 지나서는 히틀러가 쳐들어왔다. 1990년 나토는 러시아에 동쪽으로는 1인치도 전진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계속 약속을 어기며 조금씩 경계를 동쪽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마지막 주자가 우크라이나다. 턱밑에서 때려봐, 때려봐 약을 올렸는데 하필 러시아 대통령이 때리는 데 주저함이 없는 인간이었다. 아무리 이죽대도 상대가 참으면 전쟁이 안 난다고 생각하면 국제정치적으로 매우 순진한 발상이다.

전쟁은 가끔 체면 때문에 벌어지기도 한다. 냉전 시기 형편도 안 되는데 소련이 미국과 대립을 이어간 이유는 미국에 밀리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순간 동맹국들의 시선이 “뭐야, 소련 별거 아니었잖아”라며 싸늘해지기 때문이다. 러시아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전쟁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권력 강화 차원에서 유익하기도 하고). 해서 도발자와 ‘선방’ 폭행자 둘 다 ‘전쟁형 인간’이자 전범이다. 개전 250일을 넘기고 있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을 알면 전쟁이 보인다는 원칙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강경파인 이스라엘 총리가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의 핵심이다. 그는 상대국의 사회질서를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인 동시에 ‘전쟁형 인간’의 특징인, 적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쟁은 복잡하면서도 간단하다. 집주인이 방 4개짜리 집을 가지고 세입자 둘과 이중계약을 했다. 문제가 생기자 집주인은 부동산 업자를 통해 공평하게 방을 둘씩 나누어 쓰라며 타협안을 제시한다. 문제는 한 집은 식구가 10명, 한 집은 5명이었다는 사실이다. 둘 다 입이 나온 가운데 5인 가구가 먼저 입주한다. 10인 가구는 친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들은 5인 가구를 쫓아내기 위해 싸움을 벌이지만 패배한다. 10인 가구는 방 하나에서 살아야 했고, 친척들은 리턴 매치를 벌인다. 그러나 결과는 1라운드와 같아서 10인 가구는 그나마 지내던 방까지 내줘야 했다. 현재 10인 가구는 발코니에서 생활하는 중이다.

무슨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이 다 있느냐 하신다면 그게 바로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집주인은 영국이다. 10인 가구는 팔레스타인이다. 5인 가구는 이스라엘이다. 부동산 업자는 UN. 친척들은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등 주변 아랍 국가들이다. 친척들이 벌인 전쟁이 1948년부터 1973년까지 네 차례 중동전쟁이다. 10인 가구와 5인 가구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의 비율인데 이스라엘은 60여만 명, 팔레스타인인은 130여만 명이었다.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것이지만 내용은 대략 그렇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끝나도 팔레스타인 지역에 평화 같은 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한 지역에 두 나라가 들어섰으니 불씨가 옮겨갈 일은 널렸고, 전쟁을 벌일 개인적 의지가 충만한 인간은 계속 나올 것이다. 전쟁은 노인들이 결정하고 젊은이들이 싸우고 최종적으로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피해를 본다. 포격으로 죽은 아이들의 사진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그런데도 전쟁이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전쟁에는 박애주의 같은 부녀자의 정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이런 무서운 이야기를 태연하게 적어놓은 ‘그 책’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