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역사를 왜 배울까?

시험 대비용 외우기식 공부는
재미도 없고 학습 효율도 안올라

역사속에선 정치와 경제가 한 몸
전쟁이 과학기술 발전 '아이러니'도

정치·경제·전쟁·과학 등 역사지식
일정 수준 넘으면 평생 즐기는 취미
영국의 헨리 8세(그림)는 6명의 왕비와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첫 번째 왕비였던 카타리나와의 이혼은 교황청에 허락을 받아야했는데, 교황은 질질 끌며 답을 주지 않았다. 왜일까. 얕고 넓은 역사책은 이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거나 못한다. 이 문제는 영국사가 아니라 유럽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무위키
영국의 헨리 8세(그림)는 6명의 왕비와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첫 번째 왕비였던 카타리나와의 이혼은 교황청에 허락을 받아야했는데, 교황은 질질 끌며 답을 주지 않았다. 왜일까. 얕고 넓은 역사책은 이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거나 못한다. 이 문제는 영국사가 아니라 유럽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무위키
역사는 왜 배울까.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올바른 선택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건 학교 시험지에나 쓰는 답. 십수 년 역사를 공부했지만 단 한 번도 선택을 위한 기준 같은 걸 역사에서 구한 적은 없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고 현재는 미래를 나타내는 지표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다. 아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아니면 역사 공부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거나.

문제를 살짝 바꿔보자. 그렇다면 더 이상 시험 같은 걸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저런 이유를 대지만 솔직한 답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네 찐 맛집은 절대 남에게 알려주지 않는 이유와 같다. 답은 ‘재미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너무나’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 재미를 혼자만 독차지하려고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역사 공부에는 특별히 지능이 필요하지 않다. 대학 시절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알았다. 내 머리가 신통찮다는 것을. 이후 철학으로 종목을 바꾸면서 더 확실하게 깨달았다. 내 머리는 신통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심각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역사로 방향을 틀었다. 잘한 선택이었다.

역사는 (대체로) 정직하고 공부한 보상을 반드시 돌려준다. 주변을 보면 역사가 재미없다는 사람이 태반이다. 일단 수험 공부로 토막 역사를 읽었고 그러다 보니 실제 역사와 별 상관없는 연도만 지겹게 외운 탓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올바른 방향으로 역사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다. 공부가 없으니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니 공부가 안 된다. 악순환이 역사 문맹을 만든다. 미리 말하지만 인생의 막심한 손해다.

대부분의 역사책은 정치사 70%에 경제사 30% 정도의 비중이다. 아주 틀린 배합은 아닌데 약간 부족하다.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게 정치와 경제인데, 이게 보통은 한 몸으로 돌아간다. 정치가 막히면 인간은 전쟁을 선택한다. 전쟁이 지지부진해지면 다시 정치가 시작된다. 그렇다고 정치와 전쟁의 무한반복은 아니다. 전쟁을 하면 과학이 발달한다. 50년 걸릴 일을 5년 만에 끝낸다.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니까.

전쟁을 할 때마다 인류의 과학기술은 수직 상승한다. 무의미한 가정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전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인류의 모습은 15세기 어디쯤에서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전쟁에 사용된 군사기술이 민간에 풀리면 경제 혁신이 일어난다. 비행기와 잠수함을 포착하겠다고 만들었던 레이더는 현재 우리의 주방에 전자레인지라는 이름의 편리로 자리 잡고 있다.

한편 과학은 낡은 사고를 깨운다. 중세를 구체적으로 끝낸 것은 신의 영역이라 믿었던 것들을 모조리 과학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해서 정치사, 경제사, 전쟁사, 과학사, 사상사는 패키지로 이해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역사책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서점에 가보면 하룻밤에 읽는 역사, 얕고 넓게 이해하는 세계사 같은 책들이 즐비하다. 단언하지만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문제 하나 낸다. 영국의 헨리 8세는 6명의 왕비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이 중 둘의 목을 신체에서 분리한 난폭한 군주다. 사연이 하나같이 드라마틱해서 <천일의 앤> 같은 걸작 역사물의 사료가 되기도 했다. 첫 번째 왕비인 카타리나와의 이혼은 교황청에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교황은 질질 끌며 답을 주지 않았다. 왜일까. 하룻밤에 읽거나 얕고 넓게 이해하는 역사책은 이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거나 혹은 못 한다. 이 문제는 영국사가 아니라 유럽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직전 교황은 되도 않는 동맹을 만들었다가 신성로마제국 군대의 침공을 받았고, 로마는 불바다가 된다. 이때 로마 침공을 지시한 게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로, 카타리나는 그의 이모였다. 카를의 ㅋ 자만 나와도 오줌을 지리던 교황이 눈치를 보느라 이혼 허락을 망설인 것이다. 알면 쉽고 모르면 영원히 까맣게 모르는 게 역사다.

중국의 대표적 역사책이 <사기>와 <자치통감>이다. <사기>는 궁형을 받은 사마천이 울분과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쓴 책이다. <자치통감>은 사마광이 도무지 읽을 만한 역사책이 없다며 직접 쓴 책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절실한 사람은 없어 보인다.

방법은 있다. 역사를 토막토막 읽지 말고 호모사피엔스의 출발부터 현재까지 전체적으로, 순서대로 다 읽으면 된다. 역사는 재미로 공부한다고 했다. 재미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서야 그때부터 비로소 재미가 생긴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모든 종목에는 도전자를 주저앉히는 장벽이 있다. 음악으로 말하면 기타의 F코드가 그렇고, 클라리넷의 ‘시’음이 그렇고, 피아노의 검은 건반이 그렇다. 다행히도 역사에는 그런 장애물이 없다. 그저 시간을 투자해 꾸준히 읽으면 된다. 특별히 뛰어난 지능이 필요하지도 않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게 익숙해진 역사는 가성비가 가장 좋은 취미 생활이 된다. 도서 구입비 몇 만원이면 한 달이 내내 즐겁다. 그 액수로 즐길 수 있는 오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일시적 쾌락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고 누적되면서 더 큰 즐거움으로 돌아온다. 역사를 입시나 공무원 시험의 영역에 가두지 말고 취미로 끌어들여라. 인생의 막대한 이득이며 평생 즐길 수 있는 지적 오락이 역사 공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