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토마스 하디 <환상을 좇는 여인>

마치밀 부부는 웨섹스 위쪽 지방에 있는 해변 휴양도시 솔런트시에서 여름을 지내기로 한다. 영구 임대해 1년 내내 살던 독신 신사가 한 달간 자신의 집을 내주어 마치밀 부부와 세 자녀가 그곳에 묵게 된 것이다.
북부 지방의 번화한 도시에서 총기 제조업을 하는 마치밀과 부인 엘라는 겉으로 보면 다복하기 이를 데 없다. 엘라는 결혼할 당시 남편의 부유함이 좋았지만, 아이 셋을 낳은 지금은 남편을 우둔하고 고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남자 이름으로 시를 기고하는 여자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고뇌하다 죽음 맞는 여인의 비극](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AA.34501209.1.jpg)
총기 제조업자인 남편을 경멸하는 여인이 꿈에 그리던 시인과 간접적으로 조우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 달 내내 트리위의 책과 사진을 보며 그리워했으나 시인을 만나지 못한 엘라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를 잊지 못한다. 남편의 사업이 계속 번창하는 가운데 커다란 새집으로 이사했지만 마음이 텅 빈 엘라는 서정시나 비가를 쓰며 지낸다.
어느 날 잡지 최신호에서 트리위의 시를 발견한 엘라는 존 아이비라는 이름으로 축하 편지를 보낸다. 그렇게 두 달 남짓 편지가 오고 간 즈음에 지인의 아우인 화가가 트리위와 함께 웨일스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엘라는 곧바로 두 사람을 초대했지만 약속한 날짜에 화가만 방문한다.
며칠 후 엘라는 신문에서 트리위의 자살 소식을 접한다. 최근 정열적인 시를 발표했는데, 한 잡지의 신랄한 비평감이 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트리위가 친구에게 남긴 편지가 실려 있었다. “만일 하나님이 날 몹시 아껴주는 여성을 보내주셨더라면 나는 내 생명을 더 연장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네 … 찾을 수 없는 여인을 동경했다네 … 발견할 수 없고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여인이 내 마지막 시집에 영감을 불어 넣었네 … 내 환상의 여인에 불과했으며 실제하는 여인은 아니네”
엘라는 그 편지를 읽고 슬픔과 괴로움에 휩싸여 “오, 만일 그가 나를 알기만 했더라면 …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줄 수 있었다면 … 그를 위해 어떤 수치나 비방도 달게 받고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겠다는 것을 알려줄 수만 있었다면”이라며 스스로를 자책한다.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엘라는 솔러트시 숙소 주인에게 트리위의 사진과 관 뚜껑이 덮이기 전에 머리카락을 좀 얻어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심지어 엘라는 트리위의 무덤을 찾아가기까지 한다. 모든 의욕을 상실한 엘라는 넷째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몇 년 후 재혼을 앞둔 마치밀이 죽은 부인의 물건을 정리하다가 머리카락과 시인의 사진을 발견하고 넷째 아이가 시인의 아이일 것으로 의심하며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은 바로 요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생하지만 엘라가 여성이라는 자격지심에 남자 이름으로 기고한 점, 유전자 검사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마치밀이 넷째 아이에게 “넌 나와 상관없는 놈이다!”라고 외치는 마지막 부분에서 19세기를 느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