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포용과 수탈이 가른 역사
문명·야만 나누는 '편협한 사고' 넘어
동서양 '문화용광로' 헬레니즘 꽃피워
문화불모지 만든 칭기즈칸과 대조적
“소크라테스와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애플의 기술을 모두 포기할 수 있다”라는 스티브 잡스의 말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이런 실현 불가능한 조건을 전제로 하는 말은 나도 한다.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한나절을 보낼 수 있다면 남은 생의 절반을 기꺼이 투척할 용의가 있다.문명·야만 나누는 '편협한 사고' 넘어
동서양 '문화용광로' 헬레니즘 꽃피워
문화불모지 만든 칭기즈칸과 대조적
비슷한 용례인데, 이 사람의 말로 알려진 것 중 하나가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를 찾아갔을 때의 에피소드다. “내가, 내가 아니었다면 저 사람처럼 되었을 것이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수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그는 절대 디오게네스처럼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적고 검소하게 먹었는데, 누군가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위해서는 아침을 적게 먹어야 하고, 맛있는 아침식사를 위해서는 야간 행군을 하는 게 최고다.” 세상에 언제나, 영원히 맛있는 음식 같은 것은 없다. 음식 맛보다 더 중요한 두 가지는 배가 얼마나 고픈지와 몸이 얼마나 건강한지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무엇이나 맛이 있고, 병이 깊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절대 그 맛을 즐기지 못한다. 음식과 맛에 대한 세련된 통찰인데, 왜 하필 예로 든 게 야간 행군일까. 그는 전쟁을 너무나 사랑했고 그에게 저녁이란 대부분 다음 날 전투를 위해 이동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전투 전날 그는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치를 전투(사람 죽일 것)를 생각하면 흥분이 돼서 그랬다니, 상대방 입장에서는 염통이 쫄깃해지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소년 시절 그의 선생님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의 아버지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을 재건해 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위대한 두뇌를 모셔 온 것이다. 독(獨) 선생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투자의 효용을 높이기 위해 아예 왕립 스쿨을 차렸고, 향후 아들의 참모가 될 귀족 자제들을 함께 공부하도록 했다. 이때의 동기들이 나중에 이집트에서 왕조를 창시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영육(靈肉)의 동반자 헤파이스티온 등이다. 3년간 수학하는 동안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수사학도, 논리학도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필사해 선물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였다. 그는 이를 틈날 때마다 읽었고, 잘 때는 베개 밑에 깔고 잤다. 트로이를 무너뜨린 아킬레우스는 그의 롤모델이었다.
스무 살에 그는 왕위에 올라 알렉산드로스 3세가 된다. 그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가 죽었을 때 그리스 반도가 환호했다.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전역을 정복한 필리포스는 폭군이었다. 청년 왕의 실력을 테스트해 보겠다며 테베가 주동이 돼 반기를 든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시시한 전쟁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시범 케이스 삼아 과도하게 폭력적으로 반란을 진압한다. 테베에서 성인 남자는 사라졌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가 됐다. 크게 한 번 엄포를 놓은 이 양성애자 전쟁 천재는 정신적 스승인 아킬레우스의 궤적을 따라 동쪽 소아시아로 진격한다. 페르시아에 이어 중앙아시아가 그의 말발굽 아래 갈려 나갔다. 코끼리 부대, 호랑이 부대 등 지역 특산물을 동원한 별 희한한 부대를 모조리 격파한 알렉산드로스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정복한 유일한 유럽인으로 전사(戰史)에 남는다. 그가 말라리아에 걸려 이승과 저승을 오가자 부하들은 제국의 후계자를 물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대답은 “센 놈이 먹어라”였다는 설이 있는데, 아마 맞을 것이다. 그가 어릴 때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얘야, 네 아버지는 저 주정뱅이(필리포스)가 아니라 제우스 신이란다.” 반신반인(半神半人)에게 지상의 영토 같은 건 누가 다스리든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다르면서도 비슷한 그리스인 한 명과 로마인 한 명을 묶어 소개했다. 알렉산드로스와 짝이 된 것은 카이사르였다. 플루타르코스가 좀 더 후대의 인물이었다면 아마 칭기즈칸이 알렉산드로스의 파트너가 됐을 것이다.
둘은 동쪽으로 가장 멀리 간 사나이와 서쪽으로 가장 멀리 간 사나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인구를 줄이는 데 평생을 바쳤고, 이를 위해 기병 전술을 극대화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차이도 극명하다. 11년 원정 기간 동안 3만5000km를 행군한 알렉산드로스의 진격 루트에는 이렇다 할 원칙이나 방향성이 없다. 굳이 찾자면 명예 정도겠다. 반면 칭기즈칸의 서진은 무역 네트워크의 연결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문화는 둘의 평가가 확연하게 갈리는 지점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점령지에 건설한 70여 개 도시는 헬레니즘의 기지가 됐다.
몽골제국의 점령지는 문화 불모지로 전락했다. 점령지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현지인을 존중했고 평등하게 대우했다. 기원전 324년 열린 한 연회에서는 하얗고 노랗고 까만 수천 명의 손님이 같은 테이블에서 먹고 마셨다. 탁월함이란 배우지 않고도 아는 것이다. 자신은 문명, 나머지는 야만이라는 고대 그리스의 편협한 사고를 뛰어넘은 알렉산드로스의 이 탁월함을 미국 장군 몽고메리는 ‘인류애’라고 표현했다. 패배자 포용을 통한 융합이라는 놀라운 발상, 스승인 전형적 그리스 ‘꼰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