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정원>
서울 인왕산 아래 산동네에 사는 동구는 난독증이 있어 글씨를 제대로 읽지 못한다. 그럼에도 배우지 않은 한글을 척척 읽어내 귀염받는 동생 영주를 자랑스러워하는 착한 아이다. 하지만 “에이구 저 들떨어진 새끼, 아직도 글씨 못 읽는대지?”라며 면전에서 핀잔주는 할머니와 공부를 엄청 못한다는 말에 동구 따귀를 후려갈겨 꽃밭에 나동그라지게 한 아버지 때문에 괴롭다.동구가 3학년이 되던 해인 1979년, 대통령이 시해당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동구와 동구 주변 사람들을 통해 1979년과 1980년 일어난 우리나라 현대사의 묵직한 이야기와 그 시절 풍경을 담은 성장소설이다.
2002년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성장소설 이상의 성장소설’이라는 호평 속에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출간 20년이 지났음에도 독자 서평이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1972년생인 심윤경 작가는 서울대 분자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이공계 출신이다. 문장이 버석할 것으로 예상하기 쉽지만 작가는 세밀한 묘사와 독창적인 비유로 인왕산 아래 동네를 그림처럼 그려냈다.
1977년부터 1981년을 사는 다양한 군상과 군인들이 점령한 서울 중앙통을 그릴 때도 번잡스럽거나 살벌하기보다 아련하면서 가슴 저릿한 감정을 불러들인다.천사 선생님과 결혼하고 싶어즐거운 일이라곤 없는 동구에게 3학년 담임선생님의 등장은 놀랍고도 가슴 뛰는 사건이다. 엄마가 박영은 선생님에게 동구의 글씨 공부에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부탁하면서 방과 후 특별지도가 시작된다. 글씨 공부에 앞서 마음을 두드려준 박영은 선생님에게 동구는 그동안 억눌렸던 가슴을 툭 터놓는다.
선생님과 대화하면서 욕을 달고 사는 할머니와 늘 화만 내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할머니만 편들어 엄마를 외롭게 하는 아버지의 마음도 이제 좀 알 것 같다. 복잡한 일이 생길 때마다 동구는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해법을 이리저리 궁리한다. 선생님이 착안한 낱말연상법을 활용해 책도 제법 잘 읽게 된 동구의 꿈은 뭘까. 박영은 선생님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동구는 엄마에게 몇 살이 되면 결혼할 수 있는지 묻는다.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폭신한 시간을 보내는 동구 앞에 서서히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대통령 서거는 실감 나지 않지만 중앙청 앞에 군인들이 진주했다는 소식에 친구와 함께 탱크를 구경하러 간다. 하지만 가는 길에 마주친 덩치가 산만큼 큰 주리삼촌에게 끌려 돌아오면서 “철없는 녀석”이라는 핀잔을 듣는다.
4학년이 되자 온갖 회오리가 다 몰아친다. 향기를 풍기는 박영은 선생님과 달리 이상하게 눈빛이 번들거리는 새로운 담임은 한마디로 절망이다. 평범한 걸 제일 싫어한다는 오준근 선생님은 벌로 드라큘라처럼 귀를 물거나 겨드랑이 땀내를 맡게 해 반 아이들을 진저리치게 한다.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고, 그 일로 화를 내는 엄마에게 할머니는 패악질과 함께 욕을 퍼붓는다.남을 먼저 생각하는 동구아버지와 엄마가 심하게 다투던 날 동구는 영주와 뒷마당으로 피신한다. 감나무에 달린 감을 만지고 싶어하는 영주를 무동 태우다 둘이 나동그라졌고 크게 다친 영주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임시 교사에게 수업을 맡긴 6학년 담임 박영은 선생님은 감감무소식이고, 너무도 상심한 엄마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죽일 듯 몰아대는 할머니를 피해 외갓집으로 가버린다.
사랑하는 선생님과 영주는 영영 떠났고, 할머니와 엄마는 한집에서 더 이상 살기 힘들게 되었다. 5학년이 된 동구, 공부는 좀 못하지만 따뜻하고 착한 동구가 해법을 생각해낸다. 할머니의 고향에 가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함께 지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인왕산 아래 산동네 풍경,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 동네 사람들의 따스함, 1979년과 1980년을 몰아친 현대사의 격랑, 박영은 선생님을 비롯한 청춘들의 시대 고민, 마음 한쪽에 저마다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을 덜 똑똑하지만 착한 동구의 눈을 통해 그려낸 아름다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