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신현수 < 은명 소녀 분투기 >
요즘 엔저 현상에다 거리마저 가까워 해외여행객의 30%가 일본으로 향하고 있다. 일본 국민에게 세계 여러 도시 중 가장 가고 싶은 곳을 물었을 때 서울이 1위, 부산이 4위에 올랐다. 양국 국민이 서로의 나라를 찾아 즐기고 있지만 과거사를 돌아볼 때면 일본에 호의적일 수만은 없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독립군의 치열한 투쟁은 소설이나 영화, 다큐멘터리를 통해 많이 소개됐지만 중·고등학생의 항거를 담은 작품은 흔치 않다. 여학생들이 부당한 일본인 선생에게 대항하는 내용을 담은 <은명 소녀 분투기>는 범상치 않은 스토리로 눈길을 끈다.
신현수 작가는 10여 년 전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숙명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의 항일 동맹 휴학을 접하고 충격을 받아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1920년대 중후반, 일제의 교육 행태에 저항하기 위해 집단으로 등교 또는 수업 거부를 하는 동맹 휴학이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됐다.
이 소설은 1927년 5월부터 9월까지 경성 수송동에 있던 숙명여고보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항일 동맹 휴학을 모티브로 삼았다. 새로 부임한 일본인 학감과 재봉교사가 자행한 일본화 교육에 저항해 전교생 400명이 분연히 일어났고, 학부모와 졸업생은 물론 다른 학교 학생들까지 연대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모든 과정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학생들의 요구사항이 대부분 관철됐고, 후일 광주항일학생운동의 디딤돌이 된 저항운동이다. 일본인 선생들의 횡포 <은명 소녀 분투기>의 주인공 혜인과 경성은행장의 외동딸 애리, 장차 일본으로 유학 가서 화가가 될 꿈을 꾸는 금선은 늘 어울리는 2학년 삼인방이다.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4학년 음전과 3학년 미자, 1학년 귀남도 등장한다. 조선 황실에서 지은 학교인지라 비교적 일본의 간섭이 덜하지만 조회 때면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고 천황이 사는 궁성을 향해 경례해야 한다. 그런 일이 달갑지는 않으나 학생들은 꿈을 키우며 즐겁게 학교생활을 이어간다.
하지만 요시다 아키오 학감과 마쓰이 리코 선생이 부임하면서 학교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조선의 융희 황제가 승하한 날 학생들이 창덕궁으로 망곡하러 가려 하자 일본인 선생들이 “대일본제국의 황제는 위대하신 다이쇼 천황 폐하 한 분뿐이다. 망곡하러 가면 정학이다”라고 소리치며 막아선다. 학생들은 “창덕궁으로 가라”고 독려하는 조선인 선생들의 목소리에 주저없이 달려 나간다.
일본인 선생들의 일방적인 지시에 학생들은 호락호락 응하지 않는다. 기모노 만드는 법을 가르치려는 리코 선생에게 혜인과 애리는 “조선 통치마 재봉법을 배우고 싶다”고 맞선다. 리코 선생은 “너희는 조선 백성이 아니다. 위대하신 천황폐하가 다스리는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이다”라며 윽박지른다. 일본인 선생들의 횡포는 나날이 심해지고 학생들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조선인 선생이 쫓겨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다. 조선식 교육을 실시하라광복 78년이 되었지만 36년 일제 치하에서 겪은 일은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새로운 이야기가 발굴되고, 잘 몰랐던 이야기가 재조명되고, 익숙한 사건이 창작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은명 소녀 분투기>는 학생들이 직접 나서서 “일본식 교육을 즉각 중단하고 조선식 교육을 실시하라”고 강하게 저항해 의지를 관철한 실제 사건을 잘 형상화했다. 이웃 학교들과 동맹 휴학을 하는 가열찬 분위기 속에서도 여섯 학생의 아기자기한 소녀 시절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혜인 어머니의 아픈 사연과 열여섯 살 금선이 아이를 낳은 이혼녀라는 사실, 일본인과의 결혼 강요 등 그 시절 풍속에 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이 극에 달한 1940년대, 조선인을 더욱더 악랄하게 괴롭혔다. <은명 소녀 분투기> 속 여학생들은 승리했지만 이후 암울한 시절을 겪었을 게 분명하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패한 1945년에 비로소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을 수 있었다.
<은명 소녀 분투기>를 통해 그 시절을 돌아보고, 잊지는 않되 용서하는 너그러운 마음도 품어야 할 것이다. 선조들의 아픔과 기개를 음미하는 가운데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