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최영미 < 시를 읽는 오후 >
<시를 읽는 오후> 작가의 말은 ‘오랫동안 시를 잊고 살았다. 내가 시를 놓을 무렵에, 시가 나를 불렀다’로 시작한다. 바쁘게 지내다 보면 시인도 시를 잊는다지만 문득 ‘시를 읽어야 하는데…’라는 조바심이 들 때가 있다. 짧고 명료한 글로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면서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 싶기 때문이다.최영미 시인은 ‘생의 길목에서 만난 마흔네 편의 시’라는 부제가 달린 <시를 읽는 오후> 외에도 세계의 명시를 엄선해 담은 <내가 사랑하는 시>와 한국 작품을 다수 포함한 <최영미의 어떤 시, 안녕 내 사랑>을 출간해 시를 소개한 바 있다.
<시를 읽는 오후>에 수록된 한국 시는 최승자 시인의 작품이 유일하다. 최영미 시인은 ‘서른 살 무렵에 그이의 시를 처음 읽고 나는 휘청거렸다. 함께 대학원을 다니던 H와 길을 가며 최승자의 시를 이야기하다 우리는 친해졌다. 이런 시가 있었네. 우리나라에.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페미니즘 세례를 받았던 우리는 여전사처럼 피투성이인 자신을 세상에 내던진 그녀를 사랑했다’며 최승자의 시 ‘개같은 가을이’를 소개했다.
‘개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매독같은 가을./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한쪽 다리에 찾아온다.’로 시작하는 시는 저자의 말대로 휘청거리게 할 만큼 파격적이다. 최영미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뒤표지에 들어갈 추천사를 최승자 선생님께 받아 뛸 듯이 기뻤다고 부연했다. 아직 잔치가 끝나지 않은 시1994년에 출간한 최영미 시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대를 응시하는 처절하고도 뜨거운 언어로 한국 문단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는 평을 얻으며 50만 부 이상 판매된 스테디셀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하략)’라는 시도 사랑받았지만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제목이 지금도 다방면에 활용될 만큼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
<시를 읽는 오후>에는 셰익스피어나 존 던처럼 아주 오래된 시인들만이 아니라 마야 안젤루처럼 최근에 작고한 시인의 시도 실려 있다. 엄선한 시와 시인에 관한 정보, 최영미 시인의 감상을 함께 읽을 수 있다. 원어도 병기돼 있으니 원문과 번역을 함께 읽으며 시에 깊이 매료돼보라.
대학 다닐 때 친구들과 함께 읊고 다녔던 실비아 플러스의 시도 수록돼 반가움이 일었다. ‘내가 눈을 감으면 모든 세상이 죽어서 떨어지지;/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모든 게 다시 태어나지./(내 머릿속에서 널 만들어낸 것 같아.)//별들이 파랑과 빨간색으로 차려입고 왈츠를 추지. 그리고 제멋대로 어둠이 빠르게 밀려오지;/내가 눈을 감으면 모든 세상이 죽어서 떨어지지’로 시작하는 시는 ‘미친 여자의 사랑 노래’라는 제목에 부합하는 대담한 이미지로 여전히 깊은 충격을 안긴다.
도로시 파커의 ‘베테랑’은 패기 넘치는 청춘들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내가 젊고 대담하고 강했을 때,/옳은 것은 옳고,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었다!/나는 깃털 장식을 세우고 깃발 날리며/세상을 바로 잡으러 달려 나갔다./“나와라, 개××들아, 싸우자!”고 소리치고,/나는 울었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하지만 이어지는 연에서 나이 든 시인은 “세상이란 원래 그런 거야/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는 사람이 현명해./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지 이기든 지든 별 차이가 없단다, 얘야.”라고 노래한다. 마음을 두드리는 시를 찾아라44편의 시 가운데 가장 마음을 두드린 시는 예이츠의 ‘깊게 맺은 언약’이었다.
‘그대가 우리 깊게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에/다른 이들이 내 친구가 되었으나;/그래도 내가 죽음에 직면할 때나,/잠의 꼭대기에 기어오를 때,/혹은 술을 마셔 흥분했을 때,/나는 문득 그대의 얼굴을 만난다.’
최영미 시인은 시를 ‘가장 짧은 문자 예술, 우리의 가슴 속 허전한 곳을 건드리는 노래, 가볍게 날아다니다가도 심오하게 파고드는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시를 읽으며 풍성해진 마음으로 인생을 아름답게 건너갈 방도를 궁리해보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