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가즈오 이시구로 < 녹턴 >
노벨문학상과 부커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는 현대 영미권 문학을 이끌어가는 대표적 거장으로 꼽힌다.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해양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세계 전역의 독자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삶의 비전이 담긴 소설을 쓰는 인터내셔널한 작가’를 지향하는 이시구로의 바람대로 그의 작품은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를 주로 다룬다.이시구로는 그동안 일곱 권의 장편소설을 출간했는데, 세 번째 소설<남아 있는 나날>로 부커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앤서니 홉킨스와 에마 톰슨 등 톱스타를 기용해 제작한 영화가 소설을 섬세하게 표현해 화제가 된 바 있다.
<녹턴>은 유일한 단편집으로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다섯 편의 소설에 싱어송라이터를 꿈꾸었던 이시구로의 음악적 취향이 잘 담겨 있다. ‘황혼’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화자는 대개 음악을 연주하는 젊은이들이다. 일과 사랑, 묘한 함수관계 다섯 편에 각각 다른 사람이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펼치지만 ‘대부’의 테마가 넘나드는가 하면 첫 번째 소설 <크루너>와 네 번째 소설 <녹턴>은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
크루너는 ‘나직하게 노래하다, 조그맣게 속삭이다’라는 뜻의 croon에서 파생된 단어로, 1930~1940년대 유행했던 부드러운 콧소리가 가미된 크룬 창법을 구사하는 가수를 말한다.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서 연주하는 무명의 기타리스트는 어느 봄날 어머니가 좋아했던 전설적인 크루너 가수 토니 가드너를 만나 감격한다. 정작 토니 가드너는 한물간 자신의 처지에 의기소침한 상태다. 더욱이 자신보다 스무 살 어린 아내와 이별을 계획하고 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지위와 재산만으로도 유력자’이긴 하나 60대의 토니 가드너는 더 이상 주류 가수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허전하다. 그래서 성공적으로 컴백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재혼한 뒤 화려하게 재기할 꿈을 꾸고 있다. 27년을 함께 산 아내 린디를 가능성이 남아 있을 때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날 수 있도록 보내주기로 했다는 핑계를 대면서. 다시 갈채를 받고 싶은 마음과 사랑하지만 이별하려는 마음. 이해가 갈 듯 말 듯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다. 실력과 상관없는 운야상곡으로도 불리는 녹턴은 ‘저녁이나 밤에 어울리는 감정을 나타내는 몽상적인 성격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녹턴>에는 토니 가드너와 이혼한 린디 가드너가 등장한다. 그녀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닥터 보리스에게 성형수술을 받고 베벌리힐스의 최고급 호텔에서 회복을 기다리고 있다. 바로 옆방에서는 역시 닥터 보리스에게 수술받은 무명의 색소폰 연주자 스티브가 안정을 취하는 중이다.
성형수술을 통해서라도 최고의 미인이 되어 다시 행운을 잡고 싶은 린디와 달리 스티브는 심각한 갈등에 시달리고 있다. 비싼 수술비와 호텔 체류비를 전부인이 댔기 때문이다. 매니저 브리들리는 “최고의 실력을 갖고 있지만 ‘따분한 실패자형 추남’이어서 성공이 어렵다”고 해도 스티브가 움직이지 않자 “네가 성공하면 아내가 다시 돌아온다”고 부추긴다. 그 말에 흔들려 수술받은 스티브는 답답하고 모든 게 부담스럽다.
간호사를 통해 스티브의 존재를 알게 된 린디가 나서면서 두 사람은 붕대 감은 얼굴로 만난다. 스티브는 재능이 시원찮은 린디 같은 여자가 유명해진 게 못마땅하다. 린디는 스티브의 CD를 통해 그가 천재형 뮤지션이라는 걸 깨닫고 질투를 느낀다. 그 호텔에서 열리게 될 음악 시상식에서 형편없는 사람이 수상한다는 소식에 스티브가 불만을 털어놓자 린디는 “그들이 실력 없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 스티브는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데 실력 없는 사람이 상을 받는다며 “당신 같은 사람들이라고요!”라고 외친다. 싸늘해진 공간에 노력이나 재능과 비례하지 않는 인기, 실력과 상관없는 운에 대한 의문만 떠돈다.
엄청난 인맥으로 스티브를 돕기로 했던 린디는 붕대를 풀기 전에 호텔을 떠나 버리고, 좋은 기회를 놓친 스티브는 복잡한 마음으로 회복될 날을 기다린다.
<녹턴>에 수록된 5편의 소설은 잔잔한 듯하지만 녹록지 않은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음악과 황혼을 담은, 감미로우나 무게 있는 다섯 편의 인생은 결코 눈부시지 않지만 너무 어둡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