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정보라 《저주 토끼》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5월 27일, 부커상 발표를 기다렸다가 실망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2016년 한강 작가에 이어 또 한 번의 쾌거를 기대했건만 《저주 토끼》의 수상이 불발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종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판권 거래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저주 토끼》는 이미 18개국과 판권 계약을 맺었고 여러 나라에서 출간을 검토 중이다.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공포와 잔인함을 환상적으로 표현한 기묘한 이야기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면서 지금을 ‘문학 한류의 도입기’로 부르고 있다. 예전에는 세계 무대에 서려면 해당 분야의 본고장에 가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지만 이제는 국내 성과가 크면 세계의 관심이 저절로 쏟아진다. 대한민국의 높은 위상과 인터넷의 발달 덕분이다.

정보라 작가가 부커상 후보에 올랐을 때 한국에서 오히려 놀라움을 표했다. 신춘문예 같은 문단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은 작가인 데다 한국에서 비주류로 취급받던 호러, 공상과학(SF) 작품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랭크됐기 때문이다.

《저주 토끼》가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은 부커상 후보에 오르기까지는 번역가 안톤 허의 힘이 컸다. 그는 읽자마자 영미권에서 큰 관심을 끌 것으로 판단해 번역을 자처했고 영국 출판도 주선했다. 2017년 출간된 《저주 토끼》는 부커상 후보에 오르며 역주행해 장르소설에 관심없던 독자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저주 토끼》에 수록된 10편의 단편소설을 한마디로 정리하라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첫 페이지를 읽으며 앞으로의 전개 과정을 짐작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뒤로 가면서 전혀 다른 스토리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수록작 ‘머리’는 변기 속에서 머리 하나가 튀어나와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머리’를 읽고 화장실에 가는 게 무서워 변비에 걸린 독자에게 사과까지 했다. ‘몸하다’는 생리가 멈추지 않더니 임신이 된 여자에게 의사는 아빠를 만들어 오라고 지시한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에는 저주에 걸려 앞이 보이지 않는 왕자와 이웃나라 공주가 등장한다. 이후 그간의 왕자와 공주 스토리를 잊게 만드는 전혀 다른 무대가 펼쳐진다.

표제작 ‘저주 토끼’의 할아버지는 친구 대신 복수하기 위해 귀여운 토끼 전등을 만든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이 말과 함께 할아버지는 이상한 물건 만드는 집의 아들인 자신과 친하게 지내려는 아이가 없었다는 얘기부터 풀어놓는다. 동네에서 가장 부자인 양조장 사장은 이웃에게 잘 베풀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그 집 아들이 품어주면서 할아버지는 왕따당하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전쟁이 나서 양조장이 폐허가 됐지만 성인이 된 할아버지의 친구는 현대화되고 표준화된 공정으로 다시 시작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쌀을 이용하는 전통 방식이 금지되면서 에탄올에 물을 부어 만드는 싸구려 술 공장이 승승장구하게 된다. 할아버지 친구는 굴하지 않고 전통 방식을 구현한 생산방법을 연구해 성공했으나 ‘공업용 알코올을 섞어서 만들었다’는 거짓 소문이 돌면서 회사는 망하고 목숨까지 잃고 만다. 친구 대신 복수에 나선 할아버지할아버지는 여러 경로를 통해 거짓 소문을 낸 회사의 사장에게 자신이 만든 토끼 모양의 전등을 전달한다. 전등은 그 회사 창고에 처박히게 되고 밤마다 토끼들이 나타나 회사의 모든 종이를 갉아 먹기 시작한다. 이상한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나쁜 사장과 그 아들에 손자까지 목숨을 잃게 된다.

악착같은 저주와 복수를 담은 《저주 토끼》 속 10편의 이야기는 위로에 관한 우화이기도 하다. 작가는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은 용서하지 말자’고 웅변하는 소설들을 통해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롭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근미 작가
이근미 작가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저주 토끼》에 담긴 소설들을 “마법적 사실주의, 호러, SF의 경계를 초월했다. 현대 사회에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매우 현실적인 공포와 잔인함을 다루기 위해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들을 사용한다”고 평했다. 《저주 토끼》의 어떤 부분이 심사위원을 매혹시켰는지, 작가가 말하는 쓸쓸함은 어떤 것인지 생각하며 읽으면 흥미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