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고려의 멸망과 개혁의 의미 上
고려는 1231년 원나라 공격을 받은 후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걸었다. 문명이건 민족이건 붕괴를 시작한 집단은 혼란을 겪다 결국 ‘극복’ 아니면 ‘멸망’을 맞는다.자연재해나 외적의 침입, 전쟁 패배로 인한 붕괴는 백성의 엄청난 희생을 동반한다. 반면 내부에서 발생한 지배계급의 권력 교체나 쿠데타로 인한 붕괴는 백성의 실질적인 희생이 적다. 원나라 공격 후 서서히 붕괴된 고려고려는 150여 년간 서서히 붕괴했다. 그동안 원치 않은 국제전에 동원됐고, 부마국으로 독립성을 인정받았지만 영토 일부를 탈취당했다. 정동행성을 통해 정치를 간섭당하며 멸망의 길을 걸었다. 약 80년 동안 재위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등의 충(忠)은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 그들은 몽골의 피가 섞였고, 원나라에서 교육받았고, 공주와 결혼해 황제의 사위가 된 후 귀국해 왕이 됐다.
이들은 세계 제국인 원나라 궁전에서 국제 정치를 학습하고, 우수한 문명을 체험했지만, 고려에 대한 정체성이 부족했다. 그뿐 아니라 현실을 몰라 정치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필연적으로 원나라와 연결된 환관, 역관, 투항한 군인 등 친원파와 공존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심지어는 쿠빌라이칸의 사위인 충선왕을 티베트로 귀양 보냈을 정도의 권력을 가진 환관도 있었다.
매년 150명의 처녀를 공녀로 원나라에 바치면서 고려에서는 조혼 풍습이 생길 정도였다. 이때 공녀로 끌려가 토구훈 테무르(혜종)의 비가 된 기황후의 일족도 대표적인 친원파였다. 이들은 건국 이후 존재한 문벌 귀족, 무신정권의 잔재, 고급 관료와 합쳐 권문세족을 이뤄 정부의 요직을 독점했다.
또 토지를 탈취하고, 겸병해 대농장을 만들어 고려 말기에는 ‘토지의 넓이는 주(州)와 군(郡)을 넘어다니고 큰 산과 강을 경계로 했다’(고려사 78권, 우왕 14년)고 할 정도였다. 당연히 많은 농민이 노비로 전락했다. 국교였던 불교는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라마 불교의 영향을 받아 변질하고 타락했다. 불필요한 행사들, 사찰과 탑의 과도한 조성 등으로 국가 재정이 낭비됐고, 대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대사찰이 심지어는 고리대금업까지 벌였다. 왜구와 홍건적 침입으로 안보 위기고려 말기에는 외적의 위협과 빈번한 침공으로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했다. 왜구는 1223년부터 침략을 시작했다. 침략 횟수는 공민왕 20년 동안에만 100여 회가 넘었다. 우왕 당시에는 14년 동안 378회나 됐다.
14세기 중반에는 원나라에서 한족 농민의 세상을 만들려는 붉은 두건을 쓴 홍건적과 농민반란군이 등장했다. 하지만 결국 정부군에 패배한 홍건적 잔당이 만주를 거쳐 고려를 침범해 1359년에는 서경(평양)을 공격했다. 1361년에는 개경(개성)까지 침공해 왕이 안동으로 피란 갈 정도였다. 당시 조운체제에 의존한 국가 재정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백성은 농토를 잃었고 어업과 목축업을 할 수 없었다. 여기에 조세 수탈까지 심각해지자 유랑까지 해야 하는 대재난을 겪었다. 그리고 최영, 이성계, 정지, 최무선 등의 신흥 무장이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했다. 성리학을 내세운 신진사대부의 등장붕괴와 달리 멸망의 조짐은 쉽게 감지할 수 없다. 항상 뒤늦게야 전 구성원이 위기감을 느끼고, 극복하는 시도를 한다. 고려 말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왕실과 권문세족, 새 질서를 구축하려는 개혁파, 희생을 담보하고 완전한 새 세상을 꿈꾸는 무력한 일부 백성이 자기 방식으로 움직였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고려를 멸망시킨 신진사대부였다. 이들은 지방의 중소 지주로 향리 출신이 많았다. 과거를 통해 다수가 중앙정계에 진출해 있었던 학자적 관료였다.
특히 1368년에 명나라가 건국하고,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자 공민왕은 친명 반원정책을 추진하면서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신진사대부를 대거 관직에 등용시켰다. 실력과 자부심, 사명감을 가졌지만, 고위 관직에서 소외됐고, 불공평한 토지 소유로 인해 불만이 가득 찬 이들은 개혁의 이론적인 토대와 명분을 제공하고,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하는 사상과 방략으로 성리학을 활용했다.
√ 기억해주세요 14세기 중반에는 원나라에서 한족 농민의 세상을 만들려는 붉은 두건을 쓴 홍건적과 농민반란군이 등장했다. 하지만 결국 정부군에 패배한 홍건적의 잔당이 만주를 거쳐 고려를 침범해 1359년에는 서경(평양)을 공격했다. 1361년에는 개경(개성)까지 침공해 왕이 안동으로 피란 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