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주요 영업 가운데 하나인 마이너스통장 대출 때 신용이 양호한 소비자에게 이자를 더 물리는 ‘금리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신한·하나·농협은행 등 세 곳에서 확인됐다. 정부 입김이 많이 먹히는 편인 농협은행에서는 신용 1등급자의 마이너스통장 금리가 연 2.93%인 데 비해 신용도가 낮은 5~6등급은 연 2.70%다(2021년 6월 말 기준). 신한은행에서도 1등급 이용자 금리가 4등급보다 0.23%포인트나 높다. 은행 측은 이런 ‘이상한 영업’에 대해 평균의 함정이자 통계 착시라고 해명했지만 금융권에서는 그대로 믿지 않는 분위기다. ‘포용정책’을 강조하는 정부 압박에 굴복했거나 ‘알아서 긴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관치금융’은 한국의 금융산업 발전을 가로막아온 장애물이라는 지적이 많았는데, 문재인 정부 들어 과도해졌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산업의 혈맥인 금융에까지 정치논리가 개입하면서 ‘정치금융’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고신용자는 싼값으로 빌리고, 저신용자는 더 비싸게 대출하는 게 금융의 기본이다. 빌려주는 입장에서 보면 신용도가 높은 고객에겐 떼일 위험이 적고, 신용도가 낮으면 그 반대니 자연스럽다. 금융시장 원리와 어긋나는 ‘고·저신용자 금리 역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신용이 높은데 이자를 더 내는 게 원리에 맞나.
[찬성] 금융 양극화 해소 노력…복지의 연장 차원기본적으로 금융에서의 양극화 해소 노력으로 볼 필요가 있다. 코로나 충격 이후 금융과 경제를 필두로 ‘K자형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금융 약자가 제도권에서 대출받기 많이 어려워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자산과 소득 측면에서 신용도가 아주 낮은 최악의 금융 약자들만의 일이 아니다.이른바 중금리 시장의 대출 실태를 한번 보자. 중·저신용자에 대한 정책적 접근이 필요한 상황이다.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어쩔 방법이 없는 중간 지대의 금융소비자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부동산 시장을 흔든 ‘영끌(영혼을 끌어모은)’ 대출도 그런 범주에 포함된다. 필요성이 있다고 해서 이들 중금리 시장의 소비자에게 정부가 직접 이자 지원을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쓰일 데 많은 정부 예산으로는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어서 은행에 은근히 ‘부탁’을 하는 셈인데, 이게 압력으로 비치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금융회사 가운데 특히 은행은 고유의 특성이 있다. 정부가 영업 인가를 직접 내주고, 국가의 면허증으로 은행이 영업하면서 수익을 내니 이런 정부 입장을 헤아려줄 필요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앞서 “(지금까지) 신용도가 높은 사람은 저(低)이율, 낮은 사람은 고(高)이율을 적용받는 구조적 모순이 있었다”고 국무회의에서 공개 발언한 것도 상기할 만하다. 당시에는 고신용자에게 저금리를 적용해온 금융의 일반적 원리원칙을 부정한 것이어서 비판을 많이 받았다. 청와대가 즉각 “안타깝다고 한 얘기가 잘못 전달됐다”며 뒷수습에 나섰고 사태는 일회성으로 마무리됐지만, 그런 취지가 은행감독 정책에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중·저신용자에 대한 부분적 우대 조치는 코로나19에 따른 위기 극복의 한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코로나 충격에 따른 애로가 많은 계층을 위한 ‘포용금융’인 셈이다. 다양한 영역의 복지가 금융에서도 확대된다고 볼 수 있다. [반대] '신용=돈값' 동서고금의 경제원리…서민지원은 정부가 직접 해야신용도 높은 대출자가 싼값(이자)으로 돈을 빌리고, 신용이 떨어지는 소비자가 좀 더 비싼 비용으로 자금을 빌리는 것은 금융의 기본 원리다. 한국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복지 개념과 제도가 잘 발달한 서구의 경제 발전국에서도 보편 원칙이다. 현대사회에서의 원리만도 아니다. 이런 원리원칙이 무시되면 한국의 금융산업은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멀어지게 된다. 오늘날 자본이 국경 없이 수시로 오가는 게 일반 관행이다. 갈라파고스처럼 한국의 금융 시스템에서 국제사회와 따로 놀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겠나.
금융소비자에게 주는 메시지도 걱정스럽다. 신용도는 개인이 경제활동을 통해 오랜 기간 성실히 쌓아가는 것이다. 이게 무시되면 누가 힘들여 빚을 갚고, 할부금을 제때 납부하면서 신용도를 높이려 하겠는가. 동서양의 오랜 교과서도 웬만큼의 저축금보다 ‘개인의 신용’이 모든 사업의 밑천이며, 나아가 사회활동의 기본이라고 가르친다. 금융과 경제 원리를 떠나서라도 학생들에게 앞으로 뭐라고 가르칠 것인가.
몇몇 은행이 신용대출을 이상하게 운용하는 것은 ‘포용금융’을 강조하는 정부 압박에 굴복했거나 ‘알아서 긴 것’이라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심하게 말하면 ‘대출 관리를 우습게 여기는 소비자’ ‘돈 떼먹는 사회’를 정부가 조장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이 정도면 ‘관치금융’을 넘어 ‘정치금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본 문제는 은행 돈을 자기 지갑 속의 것처럼 여기는 좌편향된 일부 정치권의 잘못된 인식이다. 은행 돈은 고객이 맡긴 것이고 은행은 선의의 관리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자멈춤 특별법’이 나온 데 이어 특정 계층에 대한 대출 여부까지 당국이 간섭하고 압박도 한다. 서민 지원은 어떤 형식으로라도 필요하다. 하지만 시중은행의 팔을 비틀 일이 아니라 정부가 예산 집행을 통해 직접 하는 게 효과와 책임성 등에서 바람직하다. √ 생각하기 - '은행 돈=공공 자금' 위험한 인식…'예금 못 찾는다'에도 동의할까 은행 돈을 마치 ‘공공의 자금’ 정도로 여기는 인식은 위험하다. 은행 돈을 쉽게 빌려주라고 하거나 대출에 간섭하면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은행 자금은 모두 예금자가 맡긴 돈이다. ‘대출금이 정상적으로 상환되지 않으면 내 예금도 돌려받지 못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으면 또 다르다. 은행의 통상적 리스크(위험) 관리 업무에 대해서조차 “비올 때 우산 빼앗지 말라”는 소비자가 많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경제가 어려워 부실 대출이 늘어나도 ‘내 예금을 찾지 못하는 상황’은 상상도 않는다. 그런 식으로는 금융 발전이 요원하다. 은행업의 본질은 리스크 관리다. 대출 관리는 그래서 중요하다. 은행 자체가 신용을 기반으로 하는데 이를 무시하면 누가 은행에 돈을 맡기겠나. 정부의 예금보험 제도에도 한계가 있다. 신용 시스템이 무너지면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하고 결국 세금으로 막아야 한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고 금리를 무조건 낮추자는 포퓰리즘이나 대출 만기에 마구 개입하는 과도한 관치도 그래서 위험하다. 금융까지 정치로 접근하면 궁극적으로 피해는 약자에게 집중된다. 금융 시스템이 무너지면 취약계층은 어디에서 돈을 빌리나.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