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국어 학습
(19) 교과별로 나타나는 사회적 문체
(19) 교과별로 나타나는 사회적 문체
동양에서는 인식론을 거론할 때 흔히 주자의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를 거론한다. 격물의 기본 의미는 구체적 사물에서 나아가 그 극한에까지 사물의 이치인 리(理)를 탐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치지란 나의 지식을 극한까지 연마하고 확장해 앎의 내용에 미진한 바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주자는 사람의 마음은 앎이 있지 않음이 없어서 격물을 통해 마음속에 본디 있던 앎을 밝혀내면 치지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유가 철학의 전통적인 격물론이다. (중략)사물에 나아가 … 미진한 바가 없는 … 앎이 있지 않음이 없어서 … 대상에 이른다 … 마음에 이른다영문 ‘I have a son’을 직역하면 ‘나는 아들을 가지고 있다’이고, 의역하면 ‘나에게 아들이 있다’이다. 직역과 달리 의역은 자연스럽게 느껴져 그 뜻이 쉽게 이해된다. 이러한 직역과 의역의 효과가 옛글과 관련한 글에도 있다.
당초 퇴계는 격물을 추구한 결과의 상태, 즉 물리가 전부 파악된 경지를 뜻하는 물격(物格)을 ‘물에 격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물을 인식 대상으로 보고 인식 주체인 사람의 마음이 대상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 하지만 만년에는 물격에 대한 해석을 ‘물이 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즉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고자 하면 사물에 내재한 리가 마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일방적으로 사물에 내재한 리에 다가가서 리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고자 하면 사물의 리가 사람의 마음에 다가온다는 의미이다. 이를 퇴계는 리가 마음에 직접 이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탐구하는 것에 따라 이른다고 해석했다. 이렇게 본 까닭은 만약 리가 리의 자발성만으로 마음에 이른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마치 리가 물리적인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식 과정에서 인식 대상인 리의 능동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인식 주체로서의 마음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리자도(理自到)’이다.
- 2021학년도 교육청 전국연합평가 -
이 글에서 ‘사물에 나아가’는 유교 경전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있는 ‘즉물(卽物)’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즉(卽)’에 ‘가깝다’, ‘나아가다’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에 접(근)해’, ‘사물을 대상으로 삼아’, ‘사물을 살펴’ 등으로 의역한 것과 비교해 보자. 의역이 좀 더 쉽게 이해되지 않는가?
‘대상/마음에 이른다’도 마찬가지이다. ‘이르다’는 ‘도(到)’를 직역한 것으로 ‘목적지에 이르다’, ‘자정에 이르러서야’라는 용례처럼 ‘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의 뜻에 익숙한 우리에게 ‘대상/마음에 이른다’는 어색하게 느껴진다. 만약 그것을 ‘대상을 완전히 파악하다’, ‘마음으로 완전히 파악되다’로 의역했다면 우리는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문의 직역이 주는 어색함은 이중 부정에서도 있다. ‘미진한(다함이 없는) 바가 없는’, ‘앎이 있지 않음이 없어서’와 같이 한문에 이중 부정이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중 부정은 강한 긍정을 뜻하므로, 이것들을 ‘다하는(여기서 ‘다하다’는 ‘계속하던 일을 끝내어 마치다’의 뜻으로, ‘진(盡)’을 직역한 것이다)’, ‘앎이 있어서’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 의미가 좀 더 쉽게 이해되지 않았을까?
철수 샘은 몇 년간 교육청 전국연합학력평가 출제 때 다른 교과의 문제를 윤문(문제에 쓰인 문장을 논리적·어법적으로 자연스럽고 올바르게 다듬어 주는 것)해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수정 의견을 제시하면 그 교과 선생님들이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분의 말씀은 이랬다.
“우리 교과에서는 이 문장(어휘)을 수십 년간 사용해 왔어요. 이렇게 쓰고 우리들은 철수 샘이 말씀하는 의미대로 받아들여요. 만약 이것을 철수 샘 말씀대로 바꾸게 되면 우리 교과에서는 도리어 어색하게 느끼고 뭔가 다른 뜻인가 하며 혼란스러워해요.”
철수 샘은 그 말을 듣고 이해하면서도 안타까움을 느꼈다. 사실 교과에 따라 말하는 투가 다르고, 같은 어휘나 문장을 다른 교과와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이를 언어학에서는 ‘사회적 문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교과 입장에서는 자신의 교과에서 사용하는 말투를 학생들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말에는 철수 샘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부작용도 크다. 그 교과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말투가 어색하게 느껴져 내용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그 결과는 그 교과를 멀리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국어 시험에서는 어떨까? 국어 출제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특정 교과의 말투를 최대한 윤문한다. 그러나 교과의 말투를 무한정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말투에는 교과 특유의 개념을 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에 나아가’, ‘미진한 바가 없는’, ‘앎이 있지 않음이 없어서’, ‘대상/마음에 이른다’ 등은 바꾸다 바꾸다 바꿀 수 없어 사용한 철학(윤리) 교과의 말투이다. 따라서 이 정도의 말투는 철학(윤리) 교과를 공부하지 않은 학생들도 알아들어야 한다. 즉 국어 지문을 잘 읽고 싶으면 교과 특유의 말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에 격한’ 것… 하지만 ‘물이 격한’ 것… 마음이 … 리에 다가가… 아니라 … 리가 … 마음에 다가온다… 리가 마음에 직접 이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탐구하는 것에 따라 이른다 ‘A 하지만 B’, ‘A이/가 아니라 B’라는 문장 구조의 글을 읽을 때 A와 B를 반대말로 생각하며 읽어 주면 좋다고 했다. 이 글의 내용도 위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그 내용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알고 있다가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법 시간에 ‘철수 샘은 지영에게 선물을 주었다’를 배울 때, ‘철수 샘’은 주어, ‘지영에게’는 부사어, ‘선물을’을 목적어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 문장을 논리적·인식론적 측면에서 보면, ‘철수 샘’은 ‘주다’라는 행위를 하는 주체, ‘지영’과 ‘선물’은 ‘주다’라는 행위를 당하는 객체이다. 이를 보면 주어는 주체이고, 부사어나 목적어는 객체가 된다. (이것을 알아두면 ‘나는 할머니를 뵈었다’, ‘나는 할머니께 인사 드렸다’를 왜 ‘객체 높임’이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에 격하다’에서 ‘물에’가 부사어이므로, ‘물’은 객체가 된다. 그와 반대로 ‘물이 격하다’에서 ‘물이’는 주어이므로, ‘물’은 주체가 된다. 지난 시간에 말한 이원론적 사고에 의하면 주체와 객체는 대립되므로, ‘물이 객체가 된다’는 것과 ‘물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반대의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과 ‘(사물의) 리, 대상’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마음’을 주체로, ‘리, 대상’을 객체로 보는 경우와 ‘리, 대상’을 주체로, ‘마음’을 객체로 보는 경우는 상반되는 의미인 것이다. ㄹ에서 ‘마음에 직접’은 ‘마음이 탐구하는 것에 따라’와 반대말로 생각하고, ‘마음이 탐구하는 것에 따르지 않고(상관없이)’로 바꿔 이해하면 그 뜻이 좀 더 쉽게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 포인트 ① 직역과 의역의 효과가 옛글과 관련한 글에도 있음을 유의하자.
② 이중 부정은 강한 긍정임을 감안해 한문의 직역에 많은 이중 부정을 이해하자.
③ 교과의 사회적 문체는 어떤 개념을 말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노력이 있어야 함을 유념하자.
④ ‘A 하지만 B’, ‘A이/가 아니라 B’라는 문장 구조는 A와 B를 반대말로 생각하며 읽자.
⑤ 문법에서 말하는 주어는 논리적·인식론적 측면에서 주체이고, 부사어나 목적어는 객체임을 알아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