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45) 1차 동아시아 국제대전 '高·隋전쟁'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45) 1차 동아시아 국제대전 '高·隋전쟁'

유라시아 동쪽은 1세기 이상 분단된 남·북 중국, 몽골 초원의 유연, 동쪽의 패자인 고구려 등 4핵과 그 주변에 백제·신라·왜·말갈·거란 등의 소핵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다원적인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6세기 말에 동아시아는 중국을 통일(589년)한 수나라와 튀르크제국, 고구려의 삼각구도로 재편됐다. 400년 만에 중국을 장악한 수나라는 정치·경제적 통일을 추진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해 중화 종주권 탈환에 나섰고 고구려도 신흥 강국들과 경쟁·대결이 불가피했다. 수나라 공격 막은 요동성 성주 강이식

그런데 대동강 상륙작전에 성공하자 래호아는 공명심에 불타 별동대의 평양성 접근을 기다리지 않은 채 수군 단독으로 직접 공격했다. 그러나 이미 역이용 작전을 세운 고건무 장군(후에 영류왕)의 유인작전과 대동강 방어체제에 걸려 평양성 60리 밖에서 궤멸했다. 대기하던 을지문덕은 즉시 추격전을 펼쳤고, 보급망을 상실한 우중문과 우문술의 별동대는 서둘러 퇴각하다가 살수(압록강설, 청천강설, 대양하설)에서 매복과 수공작전에 걸려 전멸당했다. 수나라는 요하를 건너 살아온 자가 겨우 2700여 명일 정도로 대패했다(《자치통감》). 수나라는 이듬해인 613년과 614년에도 요하전선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고, 건국한 지 30년 만인 618년 결국 멸망했다. 고구려 대승의 요인과 교훈동아시아의 종주권과 무역권, 문명갈등을 놓고 중국 세력과 벌인 16년간의 대전쟁에서 대승한 고구려는 동쪽 유라시아 세계에서 위상이 높아졌다. 숱한 군수물자와 포로 등 경제력을 획득했으며 자신감 또한 커졌다. 618년에는 왜국에 포로 두 명과 악기·낙타 등을 보냈다.
고구려가 세계 전사상 최고의 대승리를 거둔 요인은 무엇일까? 먼저, 거시적인 안목을 갖고 긴박하게 변하는 국제질서의 본질을 파악했다. 전쟁상황에 대비해 민관이 철저하게 준비했고, 유기적인 방어체제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적의 해륙협공작전을 유도한 뒤 역으로 해륙방어작전을 시도해 수군과 육군을 동시에 격퇴했다. 또한 고구려인의 자유의지와 힘, 애국심과 강이식, 고건무, 을지문덕 같은 인재들을 활용했다.
미·중의 ‘새 그레이트 게임’에 낀 잼너트(jam nut: 큰 너트 사이에 넣는 얇은 작은 너트) 상태로 전락하는데도 사분오열된 채 사대주의와 반도사관에 허우적거리는 지금의 한민족은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기억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