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39) 황금의 나라 고구려
금목걸이·직경 0.2㎜ 정교한 금실, 병사 갑옷에도 금도금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39) 황금의 나라 고구려
금목걸이·직경 0.2㎜ 정교한 금실, 병사 갑옷에도 금도금


그런데 고구려에도 금관이 있었다. 1941년에는 평양 진파리 6호분에서 ‘금동 해모양구름무늬 뚫음새김’ 장식품이 나왔다. 동명왕릉에서는 심엽형 보요와 금실 100여 점을 비롯한 금관 장식품이 출토됐다. 4세기 말~5세기 초 고분인 평양 용산리 7호 무덤에서 절풍 모양의 금동관이 출토됐다. 평양 청암리 토성 부근에서는 관테 둘레와 세움 장식이 하나로 이어진 불꽃뚫음무늬 금동관이 출토됐는데, 청동 위에 아말감 도금을 했다. 당연히 수은을 채취해 정교하게 이용하는 화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손영종 《조선수공업사》). 광개토태왕릉에서 직경이 0.2㎜가 채 안 되고 표면에 요철 문양이 새겨진 금실이 나왔다. 주조, 압연, 도금, 합금, 가늘새김 등의 금세공술로 현대에도 재현하기 힘든 기술이다(박선희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그뿐만 아니다. 《신당서》에는 당나라가 645년 요동전투에서 말들과 함께 명광개(금갑, 금휴개) 1만 벌(《구당서》에는 5000벌)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놀랍게도 고구려 병사들은 황옻칠 또는 금도금을 해서 햇빛을 받으면 반사되는 특수한 갑옷을 착용하고 전투한 것이다. 군수산업으로 부국강병

《삼국사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당태종에게 다량의 백금(은)을 보낸 적이 있다. 중국 기록(《고광록》)에는 은광산에 수백 가구에 이르는 사람이 주거하며 채굴·제련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고구려는 풍부한 금과 은을 다량으로 채굴해 수출하는 한편, 주조·압연·도금·합금·가늘새김 등의 뛰어난 금세공술로 찬란한 황금문화를 발전시켰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주 지안 일대에는 1만2000여 기의 고분이 있다. 광개토태왕릉을 비롯해 직경이 60여m에서 80여m에 이르는 대형 피라미드가 10여 기 이상이다. 토목공학이 발달하고, 경제력이 뛰어난 결과물이다. 700여 년 지속된 고구려의 부국강병은 철과 황금 등의 풍부한 자원과 뛰어난 기술력을 활용한 군수산업 발달 덕분이다. √ 기억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