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4차 산업혁명과 혁신

기술은 제약을 극복하는 하나의 수단
기술 외적 요인들이 어우러져 혁신 완성
'기술경쟁력=혁신'은 잘못된 인식
[4차 산업혁명 이야기] 혁신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과거를 토대로 하죠
세계 D램 시장의 80%를 차지하던 일본 반도체산업은 1990년부터 200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쇠락했다. 2000년대 초반 당시 남은 반도체 회사는 엘피다메모리 한 곳뿐이었다. 이를 두고 많은 분석이 이뤄졌다. 일본 반도체업계의 기술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일본의 가격경쟁력을 원인으로 삼았다. 대형 컴퓨터에서 개인용 컴퓨터로 변화하는 시기에 필요한 반도체 수요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탓에 지나치게 비싼 반도체만 만들어낸 결과 일본 반도체산업이 몰락했다는 진단이다.

기술경쟁력이 바로 혁신

일본의 반도체 경쟁력 저하를 묻는 설문에서 ‘가격경쟁력’을 문제 삼은 답변 외에 주목해야 할 점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라는 답변이다. 기술경쟁력과 가격경쟁력이 별개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일본의 기술자들은 기술경쟁력이 곧 혁신이라고 믿어왔다. 이는 일본 반도체산업이 D램 시장에서 경쟁우위를 점한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D램은 1971년 인텔이 발명했다. 미국 주도의 D램 시장은 히타치, 도시바, NEC, 후지쓰 등의 일본 대기업이 주력하기 시작하면서 주도권이 일본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핵심은 고품질이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던 당시 대형 컴퓨터 업체들은 ‘망가지지 않는 D램’을 요구했다. 더 구체적으로 25년간 품질을 보증할 수 있는 D램을 요구했다.

일본은 이런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기술 개발에 몰두했다. 기존 장치들의 성능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고, 기존 장치로 만족하지 못하면 그들이 새로운 장치를 제조했다. 오늘날까지 그 경쟁력이 유지되는 일본 반도체의 미세가공 기술과 인티그레이션, 생산기술은 이 시기 형성됐다. 고성능, 고품질을 추구하는 1980년대에 걸친 경쟁력 확보 전략은 일본 반도체 기업으로 하여금 기술경쟁력은 곧 혁신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했다.

개인용 PC 등장으로 저비용 소형화가 추세

1990년대 들어서자 변화가 시작됐다. 1980년대 중반까지 국가별 시장점유율에서 1위를 달리던 일본은 점차 점유율이 한국으로 이전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1998년 한국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됐다. 핵심은 저비용과 소형화였다. 대형 컴퓨터 시대가 지나고 개인용 컴퓨터가 주를 이루던 당시 요구되는 D램은 고성능, 고품질이 아니라 저비용의 작은 반도체였다. 삼성전자는 이런 변화를 읽어내 수요에 맞는 반도체를 개발했고, 대만의 TSMC는 수탁생산만을 담당하는 파운드리를 운영해 저비용으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었다. 미국에 남은 유일한 반도체 회사인 마이크론테크놀로지 역시 처음부터 가격경쟁력을 목표로 시작했다. 더 작게 제조해 한 장의 웨이퍼로부터 만들어낼 수 있는 칩 수를 늘렸다.

한편 삼성전자가 시장점유율 1위를 점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시장을 창출하는 능력이 포함된다. 삼성의 조직에서 마케팅 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다. 이뿐만 아니라 선진국은 물론 신흥국으로까지 현지에 주재하는 마케터를 파견한다. 인도에 파견된 마케터는 인도에 살며, 인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인도의 생활방식을 체득한다. 실제 각국 사람들을 이해해야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과 기능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국가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건, 필요로 하는 물건, 사고 싶은 물건을 찾아 만들어낸다. 신흥국 시장에서 삼성의 제품이 유독 인기 있는 이유다. 즉 만든 것을 팔지 않고, 팔리는 것을 만든다.

신기술은 과거의 연속선상에서 이뤄져

세상은 결코 분절되어 발전하지 않는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 디지털 경제와 같이 신기술로 인한 다양한 변화상이 언급되지만, 과거와 분절되거나 동떨어져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모습들이 아니다. 과거의 연속선상에서 각 시기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충족할 ‘신기술’이라는 새로운 수단이 등장할 뿐이다.

성장하지 않는 경제에서의 성공이란 남의 것을 빼앗는 것뿐이다. 혁신이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혁신은 결코 기술경쟁력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직접 개발하지 못한 기술이라도 어떤 맥락에서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혁신의 마중물이 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일본 반도체산업의 과거 사례가 알려주는 시사점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혁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더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