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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흐름으로 보는 세계사 (3) 동전 시대에서 지폐 시대로
민간 은행인 스톡홀름은행이 은화·동화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1661년에 발행한 어음(은행권). 잉글랜드은행이 발행한 지폐도 이와 같은 무기명 어음의 형식을 따랐다.
민간 은행인 스톡홀름은행이 은화·동화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1661년에 발행한 어음(은행권). 잉글랜드은행이 발행한 지폐도 이와 같은 무기명 어음의 형식을 따랐다.
당나라 말기부터 북송 시대(960~1127)에 걸쳐 강남 지역이 활발히 개발되면서, 경제의 중심은 보리보다 생산력이 수십 배나 높은 쌀로 옮겨갔다. 이와 함께 경제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자, 거래 시에 쓸 동전이 심각하게 부족해졌다.

북송에서 세계 최초로 지폐가 출현한 까닭

원나라가 유통한 통화 ‘교초’
원나라가 유통한 통화 ‘교초’
이때 변방인 쓰촨에서 민간 금융업자가 무거운 철전 대신 종이로 만든 어음을 유통시켰는데, 그 편리성에 주목한 북송의 지방 관료가 교자 발행권을 상인에게서 빼앗아 수중에 있던 철전으로 발행액의 상한을 정한 다음, 지폐를 발행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지폐, ‘교자(交子)’다.

이후 지폐는 남송을 거쳐 몽골인이 세운 원나라(1271~1368)로 계승됐다. 원나라를 세운 몽골인은 동전의 사용을 일절 금지하고, 통화를 ‘교초(交)’라는 지폐로 제한하면서, 원나라는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 전체가 지폐를 사용한 지폐 제국이 됐다.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는 원나라를 ‘종이’로 경제를 움직이는 놀라운 제국이라고 소개하며, 지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은 어디에 가든지 이 지폐로 모든 것을 지급한다. 진주, 보석, 금, 은을 비롯해 온갖 물품을 지폐로 살 수 있다. 그들은 갖고 싶은 물품은 무엇이든지 사들이고, 돈을 낼 때는 이 지폐를 사용한다.”

마르코 폴로에게 원나라 사람들이 종잇조각으로 상당히 고가의 물건을 무엇이든 손에 넣는 행위는 매우 경이로운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어음’이 유럽에서 ‘지폐’가 되다

아시아와 달리, 유럽에서는 민간 상인이 어음을 변형해 지폐를 발행하게 된다.

인도양이 개발되고 해안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이 활기를 띠면서 유라시아 경제는 급속히 확대됐다. 그러자 은 공급량이 경제 팽창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고, 이에 이슬람 세계가 극심한 은화 부족 사태를 겪게 되면서 바자르(시장)에서 환전을 해주거나 신구 화폐를 교환해주던 환전상 ‘사라프(Sarraf)’가 중심이 되어 어음과 수표를 발행함으로써 부족한 은화를 보충했다(960년께).

이후 연이어 일어난 시아파 봉기로 바그다드 주변이 혼란에 빠지자 경제의 중심이 지중해로 옮겨간다. 지중해에서는 이슬람 상인, 유대 상인, 이탈리아 상인 등을 중심으로 국제 상업이 성장했고, 어음도 상인을 따라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로 퍼져나갔다.

이어진 ‘대항해 시대’와 ‘상업 혁명’으로 경제 중심이 옮겨가 북해 주변의 네덜란드, 영국이 새로운 상업 중심지가 됐고, 이때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된 유대 상인이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자산 보전에 유리한 ‘무기명 어음(은행권, 지폐)’ 기술을 발달시키게 된다. 이처럼 이슬람 세계의 은 부족 사태로 확산된 어음이 지중해를 거쳐 최종적으로 영국에서 국채와 지폐로 모습을 바꾼 일련의 움직임을 ‘장기 어음 혁명’이라 한다.

영국의 ‘파운드’는 어떻게 통화가 됐을까

근대의 화폐 시스템은 군사비 조달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발달했다고도 할 수 있다.

영국은 1689년 이래 100년 넘게 프랑스와 간헐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이런 까닭에 17세기 말 1670만 파운드였던 국채 발행액은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1783년에는 2억4500만 파운드로 14.6배가 돼 지급해야 할 국채 이자가 무려 세입의 40%에 달했다. 재정이 급속도로 악화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03년부터 나폴레옹 전쟁에 돌입했으므로 영국의 재정은 더욱 악화됐고, 총리인 윌리엄 피트(William Pitt)는 금과 파운드 지폐의 교환을 정지하기에 이른다. 잉글랜드은행에서 금화가 유출되는 것을 막지 않으면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에야 바뀌었는데, 1816년 화폐법이 제정돼 신용도가 높은 소브린 금화(순금 7.32g을 포함)가 새로이 주조되자, 금본위제가 부활하면서 금화와 태환되는 파운드 지폐의 신용 또한 단숨에 높아졌다.

1821년 5월에는 잉글랜드은행이 발행하는 지폐는 언제라도 소브린 금화와 교환이 가능할 뿐 아니라, 금화를 금덩어리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게 됐다. 이로써 금과 동등해진 파운드 지폐가 신용이 높아져 점차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이 소브린 금화는 1917년까지 100년간 금화에 포함되는 순금량을 일정하게 유지해 파운드 지폐의 가치를 담보하는 역할을 계속해왔다. 영국과 잉글랜드은행은 지폐가 남발되는 오늘날과 달리 지폐의 신용을 유지하는 데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글 싣는 순서

①화폐의 탄생과 제국의 역사
②대항해 시대와 돈의 흐름
③동전 시대에서 지폐 시대로
④달러, 세계 돈 기준이 되다
⑤통화가 움직이는 세상


김은찬 한경BP 에디터 k_eun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