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노 박사의 시장경제 이야기 (84) 흥선대원군의 길, 후쿠자와 유키치의 길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올 때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건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1871년 신미양요가 발발한 뒤 세워진 척화비 비문
흥선대원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척화비, 쇄국정책, 위정척사와 같은 꽤나 고리타분한 것들뿐이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그런 이미지가 흥선대원군의 전부를 설명해 주는 것도 아니다.
흥선대원군의 철학

내치에서 뛰어난 개혁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준 흥선대원군이 세상 물정 모르는 노인처럼 비쳐지게 된 건 역시 그의 강력한 쇄국정책 때문이다. 여기서도 변명의 여지가 아주 없는 건 아니라서 원래 조선은 500년 내내 쇄국이 국가 정책이었으니 마치 흥선대원군이 쇄국의 대명사인 양 알려진 건 다소 억울한 일이다.
다만 독일인 오베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은 흥선대원군에게 꽤 큰 충격을 줬고 그의 쇄국 정책에도 지대한 영향을 줬다고 한다. 제너럴 셔먼 호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거치며 조선은 극도로 폐쇄적인 사회가 돼 버렸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철학

흥선대원군보다 열다섯 살 아래였던 후쿠자와는 일본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후쿠자와는 실력이 있어도 성공할 수 없는 계급 사회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왕족으로 태어난 흥선대원군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개화기에 한미한 집안 출신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은 몇 가지 없었는데 다행히 후쿠자와는 외국어에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막부의 하급 통역관으로 유럽과 미국을 순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이것이 후쿠자와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고 한다.
개화기의 지식인으로서 후쿠자와는 유럽과 미국을 둘러본 뒤 언론과 교육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오늘날 일본의 손꼽히는 명문 대학인 게이오대학교와 유력 언론사 산케이 신문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현대 일본인들에게도 널리 읽히는 『학문의 권장』에서 그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며 만인은 각기 불가침의 권리를 갖는 평등하고 독립적인 인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관은 막부 정치 대신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할 것을 추구했다. 그의 사상은 메이지 유신은 물론 조선의 갑신정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은 후쿠자와를 신선 같은 인물이라며 스승으로 모셨고, 후쿠자와도 김옥균을 높이 평가한 걸로 봐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깊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의 닫힌 문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으며 나라의 문호를 열지만 이미 망국의 길을 걷기 시작한 조선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개항한 뒤에도 흥선대원군은 국가 원로로서 20년 넘게 정치에 관여했지만 결과는 대부분 좋지 못했다.
개혁과 개방은 당시 조선에나 일본에나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이미 서양 열강에 세계사의 주도권을 내준 상황에서 개방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선택 사항이 아니었지만 뛰어난 개혁 정치가였던 흥선대원군도 이를 감지하지 못했다. 반면 일본 근대화를 이룬 건 하급 무사 집안 출신의 사상가였다. 개방된 사회, 열린 사회로 가는 길은 어쩌면 우리 사회 내부의 닫힌 문부터 열면서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으며 나라의 문호를 열지만 이미 망국의 길을 걷기 시작한 조선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개항한 뒤에도 흥선대원군은 국가 원로로서 20년 넘게 정치에 관여했지만 결과는 대부분 좋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