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태양이 뜬다"고 말하지만 경험한 건 아니죠
흄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고 보죠"
[김홍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37) 흄의 철학(상): 회의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장면에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라는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이 대사는 우리말로 “그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라고 의역되면서 맛깔스럽게 표현했 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이 대사의 의미는 현실이 비록 고단하더라도 긍정과 희망을 의미하는 ‘내일’ 을 기약하자라는 뜻이겠지만, 여기서는 약간 의미를 달리하여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입장에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철학적 문제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생활 속에서 ‘내일은 태양이 뜬다’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이 말 속에는 흄의 회의론과 관련된 문제가 들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현실 속에서 문자 그대로 ‘내일은 태양이 뜬다’라는 사실을 의심하며 고민한다면 그는 아마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흄에 의하면 ‘내일은 태양이 뜬다’라는 것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사실이다. 우리는 그동안 매일 매일 해가 떴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경험함으로써 그 사실을 알 뿐이다. 물론 ‘내일은 태양이 뜬다’라는 사건이 예상대로 일어날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 원인과 결과, 즉 인과관계 또는 귀납추리로부터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소 황당하게 들리는 이와 같은 흄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흄의 인식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행하는 인상 없는 관념은 허구”

[김홍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37) 흄의 철학(상): 회의론
흄은 그동안 경험론에서 제기한 인식론적 문제, 즉 “자신이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무엇인가” 하는 데서부터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그의 인식론적 설명은 대단히 복잡하지만,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지식은 감각 경험에서 온다고 보았는데, 이것을 ‘지각’이라고 불렀다. 이 지각은 인상과 관념, 이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예컨대 과수원에서 사과를 보면서 ‘사과’에 대한 인상을 받는다. 해가 진 뒤 집에 돌아와 낮에 본 ‘사과’를 떠올려 본다. 이때의 사과는 생생하게 눈앞에 있는 사과의 ‘인상’이 아니라, 사과의 ‘관념’이다. 이처럼 인상과 관념은 정도 차이일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대상에 대한 인상 없이는 관념도 없다는 것이다. 관념은 인상을 복사한 것이고 인상을 반성할 때 생기므로, 선행하는 인상 없이 만들어진 관념은 허구일 뿐이라는 말이다. 가령 ‘황금산’은 ‘황금’이라는 단순 관념과 ‘산’이라는 단순 관념이 결합된 복합 관념으로, 황금산이 정확한 것이 아니고 허구인 것은 이에 상응하는 인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흄의 이러한 인식론은 어떤 지식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 이 기준 앞에서는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어떠한 지식도 힘을 잃게 된다. 이러한 인식론의 바탕 위에서 흄은 ‘동일한 원인에서 같은 결과가 생기게 되며 그런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필연적 연관성을 갖는다’고 보는 인과론을 비판한다. 우리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사건이 앞뒤로 연달아 일어난다는 사실뿐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건들의 연속을 지속적으로 여러 번 경험할 때, 우리는 뒤의 사건을 관찰하자마자 그것을 앞의 사건과 연결지어보고 후자를 전자의 원인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렇다면 흄에게 있어 이처럼 인과관계는 사물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사고의 습관에 불과한 것이 된다.

경험에 기초한 지식만 중시하는 것도 곤란

[김홍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37) 흄의 철학(상): 회의론
전통적인 철학자들은 인과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흄에게 와서 지식의 세계는 회의의 바닷속으로 빠져들었다. 흄의 이러한 논리는 지식뿐 아니라 자아와 같은 정신적인 실체에도 적용되었다. 그에 따르면 애초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동일한 자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란 자아는 다양한 지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아란 습관이 만들어낸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흄은 자아를 ‘지각의 다발’이라고 표현했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존재라고 말했던 것과 사뭇 다른 관점이다.

그러나 흄처럼 각자 경험에 기초한 지식만을 중요시하면, 가령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수학의 관념같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지식의 근거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칸트가 등장할 때가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한 칸트가 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역설적이다. 흄의 회의주의 덕분에 칸트는 자신이 독단에 빠져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며 이렇게 말한다.“흄은 나를 독단의 잠에서 처음으로 깨어나게 해준 사람이었다.”

◆생각해 봅시다

흄에게 있어 이처럼 인과관계는 사물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사고 의 습관에 불과한 것이 된다.

김홍일 < 서울과학고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