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문학이야기(8)] 백신애의 《적빈》](https://img.hankyung.com/photo/201803/AA.16264555.1.jpg)
매촌댁은 가난하다. 몹시 가난하다. 집 한 칸, 땅 한 뙈기 없는 이 늙은이는 남의 집 일을 거들어주고 삯을 받고, 무명베 짜는 집에 가서 일해 주고 옷감을 받는다. 부지런히 일을 하니 한 입 걱정이야 하겠냐마는 장성했음에도 제 구실을 못하는 아들이 둘이나 있다. 별명이 돼지인 큰아들은 돼지같이 둔하고 철딱서니가 없는데 결국 술 때문에 사고를 일으키고 동네에서 쫓겨나 다른 동네에 따로 살게 된다. 둘째는 그래도 착실한 편이었는데 동네 알부랑자에게 속아 노름판에서 하룻밤 새 모은 돈을 다 날리고 자신도 알부랑자로 전락한다. 아들이 돈을 날리는 바람에 논 서너 마지기 사서 제 농사를 짓겠다는 매촌댁의 꿈도 물거품이 된다. 그러나 매촌댁은 낙심하지 않는다. 아니, 낙심할 틈이 없다. 그는 쉴 틈이 없다. 당장 큰며느리가 만삭인데 해산 후 먹을 양식 한 톨이 없다. 매촌댁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또 간신히 구한 얼마 되지 않는 양식을 큰며느리와 작은며느리에게 고루 나눠주기 위해 두 집을 오가며 종종걸음 친다. 간신히 집 주인에게 얻은 약간의 양식은 큰아들이 홀랑 먹어버리고 정작 출산일에 큰며느리가 쫄쫄 굶은 채 아이를 낳자 매촌댁은 큰며느리 주려고 숨겨놓은 보리쌀을 가지러 어두운 밤길을 또 종종걸음 친다.
작품을 읽다 보면 우선 일제시대 하층민의 가난을 그야말로 몸으로 인식하게 된다. 가난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부분은 큰며느리 벙어리가 아이를 낳는 장면이다. 벙어리는 진통으로 손으로 벽을 쥐어뜯으면서도 아이를 낳지 못한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기운이 진하여 몸에 힘을 줄 수 없는 것이다. 매촌댁이 장 찌꺼기를 끓인 물을 벙어리에게 마시게 한 다음에야 간신히 출산에 성공한다.
![[문학이야기(8)] 백신애의 《적빈》](https://img.hankyung.com/photo/201803/01.16290331.1.jpg)
![[문학이야기(8)] 백신애의 《적빈》](https://img.hankyung.com/photo/201803/01.16290330.1.jpg)
매촌댁은 노란 것, 흰 것, 검은 것이 한데 섞인 몇 카락 안 되는 머리를 가졌고 누덕누덕 걸어맨 적삼에 걸레 같은 몽당치마를 입고 다닌다. 동네 사람들이 핀잔주고 놀리면 이지러지고 뿌리만 남은 몇 개 안 되는 이빨을 드러내며 ‘히에’하고 고양이같이 웃어 보인다. 남의 집 일을 해 주고 한 끼 밥을 얻어먹을라치면 김치 찌꺼기와 간청어 꼬리와 장찌개 먹던 것과 보리 섞인 밥 한 그릇을 씹지도 않고 묵턱묵턱 삼킨다. 영락없는 걸인의 행색.
작가는 32세에 요절… 재평가해야
![[문학이야기(8)] 백신애의 《적빈》](https://img.hankyung.com/photo/201803/AA.16086172.1.jpg)
저자 백신애는 《나의 어머니》로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첫 여성 당선자로 등단, 수십 편의 단편 소설과 수필을 발표했고 식민지 지식인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았다. 32세에 요절해 우리 문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나 2007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백신애 문학상’이 제정됐고 중학교 교과서에 소품 《멀리 간 동무》가 수록되는 등 재조명받고 있어서 다행이다. 《적빈》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