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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백신애의 《적빈》

    적빈(赤貧), 몹시 가난하다는 뜻매촌댁은 가난하다. 몹시 가난하다. 집 한 칸, 땅 한 뙈기 없는 이 늙은이는 남의 집 일을 거들어주고 삯을 받고, 무명베 짜는 집에 가서 일해 주고 옷감을 받는다. 부지런히 일을 하니 한 입 걱정이야 하겠냐마는 장성했음에도 제 구실을 못하는 아들이 둘이나 있다. 별명이 돼지인 큰아들은 돼지같이 둔하고 철딱서니가 없는데 결국 술 때문에 사고를 일으키고 동네에서 쫓겨나 다른 동네에 따로 살게 된다. 둘째는 그래도 착실한 편이었는데 동네 알부랑자에게 속아 노름판에서 하룻밤 새 모은 돈을 다 날리고 자신도 알부랑자로 전락한다. 아들이 돈을 날리는 바람에 논 서너 마지기 사서 제 농사를 짓겠다는 매촌댁의 꿈도 물거품이 된다. 그러나 매촌댁은 낙심하지 않는다. 아니, 낙심할 틈이 없다. 그는 쉴 틈이 없다. 당장 큰며느리가 만삭인데 해산 후 먹을 양식 한 톨이 없다. 매촌댁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또 간신히 구한 얼마 되지 않는 양식을 큰며느리와 작은며느리에게 고루 나눠주기 위해 두 집을 오가며 종종걸음 친다. 간신히 집 주인에게 얻은 약간의 양식은 큰아들이 홀랑 먹어버리고 정작 출산일에 큰며느리가 쫄쫄 굶은 채 아이를 낳자 매촌댁은 큰며느리 주려고 숨겨놓은 보리쌀을 가지러 어두운 밤길을 또 종종걸음 친다.작품을 읽다 보면 우선 일제시대 하층민의 가난을 그야말로 몸으로 인식하게 된다. 가난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부분은 큰며느리 벙어리가 아이를 낳는 장면이다. 벙어리는 진통으로 손으로 벽을 쥐어뜯으면서도 아이를 낳지 못한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기운이 진하여 몸에 힘을 줄 수 없는 것이다. 매촌댁이 장 찌꺼기를 끓인 물을 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