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잘못된 지식이 영혼 해쳐 악을 낳아 이성이 욕망을 제어할 때 내적 조화 이룬다"
![[김홍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7) 플라톤(하) 도덕론](https://img.hankyung.com/photo/201706/AA.14117791.1.jpg)
인간의 상실된 내적 조화의 회복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이 욕망에 대하여 제 기능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악을 낳았던 것이 무지와 잘못된 지식이었기 때문에 지식만이 덕을 다시 낳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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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과 체질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지에 대한 자각을 요구하고 있는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아테네 사람들은 소피스트의 영향으로 상대주의적 지식에 안주하여 무지의 잠을 자고 있었다. 여기서 아테네 사람들의 ‘등에’로서 이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살펴보자.
“오 훌륭한 사람이여, 그대는 지혜와 힘에 있어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명성이 높은 나라인 아테네의 시민이면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까 하는 데에만 머리를 쓰고 또 평판이나 지위에 마음을 쓰고, 사려나 진리에 대해서 또 영혼을 가장 훌륭하게 하는 데에는 생각도 않고 염려도 하지 않으니 부끄럽지 않은가?”<소크라테스의 변명>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아테네 사람들은 무지로 인해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소홀히 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을 더 귀하게 여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영혼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고,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일’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지의 소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그가 아테네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무지의 소치라고 진단하는지에 대하여는 설명이 필요하다.
이데아와 실재 혼동하면?
플라톤의 이데아설에 비추어 볼 때 소크라테스가 말한 영혼을 돌보는 일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에 의하면 인간 영혼의 무질서는 이데아와 실재를 혼동한 결과다. 도덕적인 악은 무지의 결과다. 잘못된 지식은 욕망이 이성에 영향을 미쳐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은데 마치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때 발생한다. 이 경우 영혼의 조화가 무너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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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도덕적 발전은 그의 지적 성장과 비례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참된 지식은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사소한 것과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구분해준다. 사소한 것의 추구는 행복감을 낳을 수 없는 반면 가치 있는 행위는 그에 상응하는 행복과 덕으로 인도된다. 이제 다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세속적인 가치보다 영혼을 돌보는 데 관심을 쏟으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이러한 가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내면의 행복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플라톤이 선한 삶이라고 생각한 것은 내적 조화와 지식이 행복과 융합되는 삶이었다.
세 가지 덕 … 서양 도덕론 뿌리
영혼의 세 부분에 대응하는 세 가지 덕은, 이 부분들이 각각의 기능을 실현할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욕망이 분수를 지켜서 영혼의 다른 부분을 침해하지 않을 때 절제의 덕을 낳는다. 또한 영혼의 기개 부분에서 나오는 의지력이 한계를 지킬 때, 용기의 덕이 이루어진다. 이성이 욕망의 공격에 동요되지 않고 참된 이상을 계속 지켜 나간다면, 그때 지혜의 덕이 성취된다. 한편 영혼의 각 부분이 자신의 특수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때, 덕인 정의가 이루어진다. 정의는 그 각 부분에 고유한 의무를 부과하므로 보편적인 덕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도덕철학은 서양의 도덕체계의 근간이 되었으며, 서양의 도덕관념이란 화이트헤드가 갈파한 대로 플라톤의 도덕관념에 대한 주석(註釋)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