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어렵다고, 재정이 부족하다고 해서
무작정 돈을 찍어내서는 안 된다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의미를 지닌 계영배(戒盈杯)에는 사이펀(siphon)이라는 과학의 원리가 숨어 있다. 사이펀은 기압의 차와 중력을 이용해 액체를 움직이게 하는 U자형 관(tube)으로, 이 장치가 적용된 계영배는 70% 이상이 술로 차면 술이 모두 잔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제작됐다. 그렇다고 해서 계영배가 단순히 과음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절주배(節酒杯)인 것만은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참된 의미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억제하고 권력을 탐하는 것을 배척하라’는 공자의 과유불급(過猶不及) 교훈에 오히려 더 가까워 보인다.무작정 돈을 찍어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교훈은 또한 주당뿐만이 아니라 화폐 발행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국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경제가 어렵다고 또는 재정이 부족하다고 해서 무작정 돈을 찍어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우리는 일찍이 독일의 사례에서 무분별한 화폐 발행의 폐해를 목격한 바 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로 결심한 독일은 보불전쟁(1870~1871)의 경험에 비춰 전쟁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막대한 전쟁 비용을 증세가 아니라 국채 발행으로 충당하기로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하지만 전쟁은 독일의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됐고, 설상가상으로 패전국이라는 멍에까지 떠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정부 지출이 눈덩이처럼 늘어 종전 후 독일 정부의 부채는 1500억마르크에 달했고, 국채 남발로 통화 가치가 하락해 1923년 달러당 환율은 4조마르크를 넘어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더욱 큰 난관은 전쟁배상금 문제였다. 1차 세계대전의 교전 당사국들은 평화 회복을 위해 베르사유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을 통해 독일은 1320억마르크에 달하는 전쟁배상금을 승전국들에 지급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1320억마르크는 당시 독일 국민 전체가 몇 년간 생산한 것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아야 마련할 수 있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여기서 독일 정부의 악수(惡手)가 나타나게 된다. 엄청난 부채와 배상금을 갚을 길이 없었던 독일 정부가 그만큼의 돈을 인쇄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화폐청의 윤전기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돌아갔고, 독일 정부는 필요한 만큼 돈을 찍어냈다. 전쟁으로 대부분의 생산 시설이 폐허가 돼 상품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중에 마구잡이로 돈이 풀리자 마르크화 가치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시장에서는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빵 한 조각이 800억 마르크에 거래됐고, 맥주 한 잔은 2000억마르크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마저도 가격이 하루에 수차례 오르는 까닭에 술집 주인들은 맥주값을 후불로 받았고, 노동자들은 일당을 오전, 오후로 나누어 받았다. 상황이 이쯤 되자 돈이 더 이상 돈이 아니라 휴지나 쓰레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게 됐다. 땔감을 사는 것보다 돈으로 불을 지피는 게 싸게 먹혔고, 지폐를 벽지 삼아 도배를 하는 것이 시간도 절약되고 편리했다.
무분별한 화폐 발행으로 인한 경제 혼란은 비단 남의 나라 일만이 아니었다. 독일의 경우보다 조금 앞선 19세기 중반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발생한 적이 있다. 1863년 철종에 이어 조선의 왕위에 오른 이는 열두 살의 어린 고종이었다. 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오른 까닭에 모든 권력은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된다. 당시 조선은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세력에 의해 모든 것이 좌우되던 세도정치의 전성시대였다. 흥선대원군 역시 세도가들로부터 핍박과 억압을 받아왔던 터라 실권을 잡자 강력한 왕권 회복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왕권 강화의 상징으로써 경복궁 재건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태조 이성계가 개국 직후 건립한 조선의 제1궁이자 법궁인 경복궁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소해 고종 때에 이르기까지 폐허로 남아 있었다. 이에 조선 초의 강력했던 왕권 시대로 돌아가기를 희망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당시 조선은 당파싸움과 세도정치의 폐해로 경제가 어렵고 국가재정이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여기에 서구열강의 침입에 대비해 군비 증강의 필요성까지 대두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규모 토목공사에 투입할 자금이 마땅치 않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흥선대원군은 기부금의 일종인 원납전(願納錢)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다. 백성들이 원하는 만큼 돈을 내도록 한 것이었는데, 말이 좋아 그렇지 실상은 강제 모금과 다를 바 없었다. 이 외에도 논과 밭에 세금을 매기는 결두전을 징수했고, 한양의 사대문에 통행세를 신설해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자금은 충분치 않았고 대원군의 경복궁 재건 의지도 확고했다. 이때 나타난 것이 바로 당백전(當百錢)이었다.
당백전은 기존에 사용되던 상평통보에 비해 액면가가 100배인 고액의 화폐였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당시 화폐 가치는 재료의 중량과 동일하게 매겨졌는데, 당백전은 구리의 함유량이 상평통보보다 불과 5~6배 높았을 뿐이다. 약 20배의 가치가 부풀려져 있었던 셈이다. 조선 왕조는 이러한 악화(惡貨)를 만들어 그 차익을 경복궁 재건에 활용할 요량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1600만냥가량의 당백전이 주조됐는데, 이는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1000억원이 넘는 금액으로 당시 시중 통화량 전체보다 많은 거액이었다.
공급이 많아지면 가격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는 화폐에도 통용되는 논리로, 시중에 돈이 넘쳐나면 화폐 가치가 떨어져 물가가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된다. 당백전 발행 전 한 포대에 7~8냥 정도 하던 쌀값이 불과 1~2년 사이 6배 넘게 폭등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일이다. 당백전은 발행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사용이 중지되고 회수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경복궁 재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신설한 각종 명목의 세금과 악화 당백전의 주조까지, 연이은 실정으로 흥선대원군에 대한 여론은 갈수록 흉흉해져 갔다. 결국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자 시작된 경복궁 재건 사업은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해 민심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대원군의 정치적 생명까지 단축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정원식 < KDI 전문연구원 kyonggi@kdi.r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