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온정 잣대로 시장 개입하면 생산적인 기업가 정신 사라져
자유시장·사유재산 보호않는 나라…역사적으로 쇠퇴의 길 걸어
복지제도와 사회안전망 구축은 시장경제와 전혀 다른
사회정책 영역서 고민하고 풀어야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 정의를 상징하는 여신은 오른손에 칼, 왼손엔 천칭저울을 들고 있다. 저울은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는 기준을, 칼은 엄정한 제재를 상징한다. 그리고 정의의 여신은 대개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있거나 장님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상대가 누구든 인정과 사정을 두지 않고 무정(無情)하지만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결한다는 의미다.자유시장·사유재산 보호않는 나라…역사적으로 쇠퇴의 길 걸어
복지제도와 사회안전망 구축은 시장경제와 전혀 다른
사회정책 영역서 고민하고 풀어야
오늘날 이 무정한 여신은 많은 나라에서 법을 관장하는 사법부의 상징 문양으로 사용된다. 오른손에 칼 대신 법전을 끼고 있는 점이 신화 속 여신과 다르지만 한국 법원의 상징도 이 여신이다. 한국 법원이 서양 신화의 신을 상징으로 삼은 까닭은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함을 강조하는 데 이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법 앞의 평등을 구현하려면 법관부터 무정해야 한다. 재판을 받는 사람의 지위의 높고 낮음, 재력의 많고 적음, 인연의 깊고 얕음에 따라 법관의 법률 해석과 판단이 오락가락한다면 법 앞의 평등 원칙은 깨지고, 유착비리와 부정이 만연하면서 국가 근간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중국의 고대 철학자 노자도 이와 다르지 않아 ‘훌륭한 지도자(聖人)는 어질지 않다(不仁)’고 했다. 2500년 전 그가 쓴 도덕경(제5장)을 보면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세상 만물을 꼴개로 삼는다. 훌륭한 지도자는 어질지 않아서 세상 사람을 꼴개로 삼는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 꼴개는 고대 중국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기 위해 지푸라기로 만든 개의 형상인데, 제사가 끝나면 함부로 내다 버리는 물건이다.
노자가 말한 요지는 추측건대 올바른 정치는 법과 원칙에 충실해야 하고 사사로운 인정(仁情)에 휩쓸리지 않아야 함을 경고한 것으로 풀이된다. 오늘날의 정치 상황을 보면 정치인들은 이익단체 또는 지지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현행법 체계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는가 하면 재정적 부담은 고려하지 않은 채 개인이 사적 판단으로 행한 일에 대해서도 국가가 책임지고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사례가 많다. 2500년 전의 노자가 설마 지금의 상황까지 내다보고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법과 원칙에 어긋나면서까지 국민 각자의 사정에 대해 국가 부담으로 인심을 쓰고 환심을 사려는 정치인의 속성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자연이 어질지 않듯이 시장도 어질지만은 않다. 시장을 불인(不仁)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첫째, 시장 거래는 비인격성(impersonality)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물건을 사려고 어느 가게에 들어가 한참을 고르다가도 끝내 가격이나 품질이 맘에 들지 않으면 나와서 다른 가게를 찾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게 시장이다. 똑같은 메뉴를 제공하는 음식점이 이웃하고 있는데 한 집은 손님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가 하면 바로 옆집은 휑하니 파리 날리는 경우도 종종 본다. 간혹 남다른 이타심이나 동정심에 이끌려 장사가 안 되는 가게를 찾아주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음식 맛이 다른데 두 번 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 상품이나 서비스 사업은 적자생존의 경쟁에서 밀려 도태된다.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은 마치 정의의 여신이 왼손에 든 천칭저울처럼 무정하고 냉정하게 작동한다.
둘째, 시장 과정은 끊임없는 경쟁의 연속이다. 기회 포착에 뛰어난 역량을 갖추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과감하게 행동에 나서는 사람이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유지해오던 일도 하루아침에 사양산업이 될 수 있는 게 시장경제다.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을 출시하자 기존 폴더폰 산업 생태계가 순식간에 무너진 것도 그런 사례다. 창조적 파괴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슘페터의 지적은 논리적으로 맞지만 파괴의 대상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겐 이 무정한 논리가 위안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이 틈새를 파고들며 시장경제를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로 비유한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가 병약한 들소를 쫓고, 치타가 가젤을 먹잇감으로 사냥하듯이 시장경제는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강자가 약자를 희생시키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국가의 개입과 조정을 통해 정글 자본주의 문제점을 시정해야 한다며 예를 들면 ‘동정적 보수주의’ ‘제3의 길’ ‘자본주의 4.0’ ‘사회적 경제’ 등을 새로운 기치로 내세운다. 이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는 따뜻한 정치의 손길로 시장경쟁을 제한하거나 조절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하면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경쟁은 누구에게나 힘든 과정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경쟁하지 않고도 얻고자 하는 바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 길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장경제 비판론자들이 약속하는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를 보면 자유로운 시장, 사유 재산권 보호, 작은 정부의 원칙을 지켜온 나라는 성공했고 거꾸로 간 나라는 쇠퇴했다.
왜냐하면 경제는 인센티브의 문제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도 아주 관대한 장애인 정책을 시행한 적이 있는데, 그 결과 1980년대 말에 이르러 전체 노동 인구의 15%가 장애인으로 분류돼 정부 보조금을 타 갔다. 이와 같이 시장 과정에 국가의 직접적이고 온정적인 개입은 개미를 희생시켜 베짱이를 우대하는 격이라 국민 사이에 무임승차와 도덕적 해이의 문제를 야기한다.
따라서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매정하지만 시장의 불인을 인정하고 경제는 시장원리에 따라 움직이도록 맡겨야 한다.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렸던 수건을 벗고 상대방이 누군지 보고, 개인적 사정과 정무적 판단까지 감안해 천칭저울을 조절한다면 그 여신은 더 이상 정의의 여신일 수 없을 것이다. 또 법관이 그렇게 법 판단을 한다면 유착비리와 부정이 만연하면서 법치주의 원칙이 붕괴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인의 시장 과정에 국가가 온정의 잣대로 개입하기 시작하면 생산적인 기업가 정신은 쇠퇴하고, 시장은 제한된 파이를 더 가져가기 위해 다투는 지대추구 정치판으로 변질될 것이다. 복지와 사회안전망의 확보도 필요하지만 그 문제는 시장경제와는 전혀 다른 사회정책의 영역에서 고민해야 할 사안이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