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독립 선포한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1945년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3년의 미군군정을 거쳐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세계 만방에 선언한 대통령이지만 그를 제대로 알고 있는 학생은 드물다.

그는 한국의 갈릴레오다

이승만 대통령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갈릴레이 갈릴레오(1564~1642)와 비교해 보는 것이 좋다. 이승만 대통령은 갈릴레오와 같은 천문학자는 물론 아니다. 갈릴레오와 이승만 대통령은 ‘천동설’에 도전했다는 측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갈릴레오는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이 지배하던 시절, 명확한 관찰로 ‘지동설’을 입증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이 천동설을 믿고 있었던 탓에 재판에서 지동설을 드러내놓고 설파하지 않았다. 세상이 잘못 믿고 있는 것을 뒤집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갈릴레오는 보여줬다. 1945년 해방 전후 아시아 정세도 천동설과 비슷했다. 러시아에서 공산사회주의가 기존 체제를 뒤집은 이후 공산사회주의는 동유럽과 아시아 전역을 붉게 물들였다.

당시 남한 내 많은 지도자과 지식인들도 사회주의를 외쳐댔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사회주의는 망국의 길’임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고 했다. 세계가 공산사회주의(천동설)를 외칠 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지동설)를 주창했다. 남북한의 운명은 이때 갈렸다. 북한은 천동설로 갔고, 우리는 지동설로 갔다.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도 ‘이승만의 지동설’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지개혁에 성공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에 성공해 근대화의 기초를 다졌다. 방법은 유상매수, 유상분배였다. 몇몇 교과서에선 북한 김일성이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실시해 남한보다 나았다고 쓰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 정권은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로 민심을 잡는 데 성공했지만 실제로 무상분배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김일성은 지주 농지를 빼앗아 소작농에게 경작권만 주었고 모든 생산물의 25%를 현물세로 받았다. 이후 북한정권은 경작권마저 빼앗아 협동농장화 했다. 소작농들은 결국 국가의 농노가 됐다. 이후 북한의 농업 생산성은 급격하게 떨어져 1990년대 대규모 기아사태로 연결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이 없으면 근대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봉건 지주제였던 우리나라는 농민이 부담해야 하는 소작료가 매년 수확량의 50~70%일 정도로 소작농들이 힘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주에게 지가증권을 발행해 토지를 유상으로 사들였다. 소작농은 1년 수확량의 150%를 5년에 걸쳐 내면 농지를 불하받을 수 있었다. 지주에겐 증권을, 소작농에게 땅을 유상매각했다. 소작농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가격이었다. 이에 따라 자작농의 비율은 95.7%로 치솟았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6·25전쟁이 터지기 두 달 전에 이뤄졌다. 만일 농지개혁이 이뤄지지 않고 전쟁이 났다면 농민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약속한 북한편에 섰을 것이란 분석이다.

방위조약·교육개혁…성장 토대

이승만 대통령의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최대 외교업적으로 꼽힌다. 6·25 전쟁을 하루빨리 마무리 짓고자 했던 미국을 상대로 이승만 대통령은 독단적으로 반공포로 2만7000여명을 전격석방했다. 이로 인해 휴전협정은 틀어졌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국무부 차관보 로버트슨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승만은 전략적으로 미국을 이용해 공산주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던 ‘가난한 나라’ 한국의 안전을 미국이 지켜줄 것을 요구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인해 6·25전쟁 발발 직전 10만명에 불과했던 국군은 70만 대군으로 성장했다. 전방을 미군이 지키도록 해 안보를 튼튼히 했고 이는 경제발전의 초석이 됐다.

교육개혁도 그의 업적이다. 1945~1948년 1인당 국민소득은 35달러였다. 글자를 못 읽고 셈을 못하는 문맹률은 10명 중 8~9명에 달했다. 남녀 차별이 남아 있었던 당시에 여자들도 교육받을 수 있도록 최초의 남녀공학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이승만은 건국 이후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했다. 근대화와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선 문맹률을 낮춰야 했다. 이른바 ‘이승만 키즈’가 나중에 경제성장의 인적자본이 됐다.

외국서 서거한 건국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의 말년은 평탄하지 않았다. 선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비리가 연이어 터졌다. 3·15 부정선거와 혼탁한 정치는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이 져야 할 책임으로 돌아왔다.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태까지 정세가 악화됐다. 결국 그는 대통령에서 하야해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건국대통령은 하와이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의 나이 90세였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