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7)
(5) 고구려,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다
(8) 일본 열도로 건너간 백제 문화
(9) 실크로드의 끝에 신라가 있다
(10) 진흥왕, 한강을 차지하다
(11) 뉴욕으로 날아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5) 고구려,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다
(8) 일본 열도로 건너간 백제 문화
(9) 실크로드의 끝에 신라가 있다
(10) 진흥왕, 한강을 차지하다
(11) 뉴욕으로 날아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한국사 공부] 무령왕릉이 알려준 백제의 미](https://img.hankyung.com/photo/201502/01.9603160.1.jpg)
우연히 발견된 벽돌무덤 무령왕릉
![진묘수](https://img.hankyung.com/photo/201502/AA.9585419.1.jpg)
지난 시간에 봤듯이 백제는 5세기 장수왕의 파상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뺏기고 웅진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웅진에서 자리를 잡는 것도 쉽지는 않았어요. 귀족 세력들이 나약해진 왕권에 도전하면서 어수선했죠. 문주왕과 동성왕이 반대 세력에 의해 살해됐으며 귀족들의 모반은 연이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이를 확실하게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 무령왕이었습니다. 그는 반란 세력을 직접 제거했으며 고구려에 대한 공격에 나서 국력을 결집시키는 통치력을 발휘합니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무령왕을 매우 뛰어난 인물로 묘사했는데요. 그에 따르면 왕은 키가 8척이고 눈썹과 눈이 그림 같았으며 매우 용맹하고 기묘한 전략을 잘 세웠다고 해요. 심지어 무령왕은 몸을 사리지 않고 기병 3000명을 직접 거느리고 나아가 고구려군을 물리치기도 했답니다. 또한 제방을 튼튼히 하고 농사에 전념하여 백성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고 해요. 이런 백제에 대해 당시 중국은 “다시 강국이 됐다”고 평가했죠.
동아시아 문화 네트워크의 정점
![[한국사 공부] 무령왕릉이 알려준 백제의 미](https://img.hankyung.com/photo/201502/AA.9552022.1.jpg)
무령왕릉은 기본적으로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무덤입니다. 삼국시대 왕릉이 대부분 돌을 활용한 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죠. 연꽃 문양을 중심으로 수천 점의 벽돌을 쌓았는데 그 방식은 터널식입니다. 이 구조는 중국 남조 양식으로 당시 백제가 중국 양쯔강 이남의 양나라와 교류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불교 세계를 상징하는 연꽃 문양은 두 벽돌이 합쳐져야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관 입구에는 쇠뿔을 달고 돌로 만든 동물이 무덤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기 돼지마냥 자그마한 덩치인데요. ‘진묘수’라고도 불리는데, 외부의 침입자를 막고 죽은 왕의 영혼을 하늘로 데려가는 역할을 합니다.
왕과 왕비의 머리맡에는 금관모 장식 한 쌍이 발견됐어요. 중국의 역사서에 백제 왕은 검은 천으로 된 관에 금꽃을 장식했다고 하는데요. 이를 증명하는 유물이기도 합니다. 왕의 관모 장식은 불꽃 모양을 기본으로 하면서 이른바 ‘당초문’이라 하여 식물의 덩굴이나 줄기를 물결 문양으로 나타냈죠. 참고로 이 당초문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들어왔으며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동서 교류의 흔적이기도 하죠. 물론 백제 미술의 독자성도 보입니다. 왕비의 관모 장식은 연꽃 모양을 좌우대칭으로 새긴 것인데요. 우아하면서도 간결한 아름다움을 선보입니다. 왕의 시신 옆에는 둥근 고리 모양 자루 장식의 칼이 놓여 있었어요. ‘환두대도’라고 하는데 이 둥근 고리 안에는 용을, 바로 아래 자루에는 봉황을 장식해 무령왕을 최고 군주로 모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 중흥의 실마리, 무령왕릉
한편 무령왕의 목관은 놀랍게도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산 금송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당시 백제가 일본과 교류한 것을 알 수 있죠. 흥미로운 것은 왕비의 발 부근에서 청동다리미가 발견됐는데요. 이는 일본에서도 간혹 나오는데 중국 남조의 제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 남조 양나라와 백제, 일본으로 문화적 교류가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이렇게 무령왕릉은 6세기 백제가 튼튼한 동아시아 바다 네트워크를 통해 중흥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를 통해 성왕대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며 더욱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이해하게 해주는 역사적 실마리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