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 산유국 美-사우디 주도권 싸움
OPEC 회원국도 감산 놓고 입장 갈려
러시아 등 석유수출국 통화가치 급락
[Cover Story] '치킨게임' 에너지 전쟁
석유는 세계경제를 이끄는 핵심 에너지다. 석유는 공장을 돌리는 에너지원이고, 자동차 항공기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또한 석유는 근현대사에서 패권싸움의 중심에 선 에너지다. 유가의 움직임에 지구촌의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최근 국제유가가 크게 하락하면서 국가별, 산업별로 희비는 크게 갈리고 있다. 유가하락은 전반적으로 세계경제에 도움이 되지만 산유국들은 울상을 짓는다. 특히 국가경제에서 석유의존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러시아는 루블화 가치가 사상 최저로 폭락하는 등 유가하락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유가하락을 놓고도 분석이 다양하다. 수요 부진, 달러 강세, 셰일가스(오일) 증가 등의 요인 외에 양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 간 에너지 패권싸움 때문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이들 양국이 석유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유가급락…올 고점 대비 40% 급락

국제유가의 하락세가 가파르다. 현재 국제 3대 유종인 브렌트유,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두바이유 가격은 배럴당 70달러를 오르내리고 있다. 올 최고치 대비 40% 정도 급락한 가격이다. 2008년엔 국제유가가 배럴당 140달러까지 치솟았다. 현재 유가는 4년여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내년 초까지 감산에 합의하지 못하면 배럴당 40달러 선까지 국제유가가 추가 급락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국제유가와 맞물려 금, 은, 구리 등 상품가격도 4~5년래 최저치를 맴돌고 있다.

사우디-미국의 ‘치킨게임’

최근의 국제유가 급락은 단순히 수급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원유시장을 둘러싼 파워게임이 유가를 하락시킨 결정적 요인이라는 얘기다. 원유시장 패권게임의 중심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이 있다.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이자 일종의 석유 카르텔인 OPEC의 리더격인 사우디는 셰일가스(원유)로 글로벌 원유시장에서 영향력이 급부상하고 있는 미국을 견제하려 한다. 지난달 OPEC 회의에서 예상과는 달리 회원국들이 감산 합의에 실패한 것도 사우디의 이런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사우디는 저가 원유 전략으로 미국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한다. 원유값을 하락시켜 셰일유(가스·원유) 생산을 막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셰일유는 사우디 원유보다 생산비용이 높기 때문에 국제유가가 하락하면 셰일유 업체들이 도산으로 몰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번 유가하락엔 미국의 깊은 의도가 숨어있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러시아와 적대 국가인 이란 베네수엘라, 원유가 주수입원인 이슬람국가(IS)의 석유 판로를 차단해 이들을 궁지로 몰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유가는 미국 경제에도 상당한 부담을 준다. 원유게임이 스스로에게 칼을 겨누는 ‘치킨게임’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석유 카르텔 OPEC에 ‘균열’

OPEC 회원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쿠웨이트, 베네수엘라 등 12개국이다. OPEC은 유가의 변곡점마다 증산이나 감산을 통해 국제유가를 그들이 원하는 수준으로 맞춰왔다. 하지만 이번에 사우디의 주도로 감산합의에 실패하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한 OPEC 회원국들은 국가파산을 걱정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베네수엘라, 나이지리아 등은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야 재정수지 균형을 맞출 수 있다. 유가 급락이 이어지면 이들 국가는 국가파산 공포가 커질 수 있다. 나이지리아, 이란도 상황은 엇비슷하다. 이에 따라 감산을 놓고 OPEC 내 마찰이 심화되면 회원국 간 균열이 커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과 유럽은 유가하락의 대표적 수혜국이다.

이동 시작된 글로벌 자산

국제유가 하락으로 인한 금융·자산시장 후폭풍도 거세다. 유가급락의 직격탄을 맞은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주요 외신들은 러시아의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까지 언급하기 시작했다. 미국 셰일가스 업체들의 주가는 반 토막이 났다. 글로벌 자금이 금 구리 등 원자재 시장에서 발을 빼면서 주요 상품 가격도 4~5년래 최저치로 하락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가 약세로 여타 상품시장에서도 매도 우려가 커지고 있다며, 투자자들이 원자재 펀드에서 돈을 빼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원유 수출국과 수입국의 명암은 엇갈리지만 유가하락이 세계경제 전반에는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사무총장은 “유가하락은 세계경제에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 세계 3유종은 WTI·브렌트유·두바이유

서부텍사스원유(WTI), 브렌트유, 두바이유는 세계 3대 유종(油種)이다. 서부텍사스원유는 미국 서부 텍사스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유로, 흔히 WTI로 약칭된다. WTI는 국제 원유 가격을 결정하는 대표적 유종으로, 미국 내 현물·선물로만 거래될 뿐 국제시장으로 반출되지는 않는다. 세계 최대 선물거래소인 뉴욕상품거래소(NYMEX)에 상장된 유종이다. 황의 함량이 낮고 원유의 비중을 나타내는 API도가 높아 탈황(황산화물을 제거하는 것) 처리에 비용이 적게 든다. 또한 원유를 정제할 때 가격이 비싼 휘발유와 나프타 등 고급 유류가 상대적으로 많이 생산된다. 생산비도 적게 드는 편이다.

브렌트유는 영국 북해지역에서 생산되는 원유로, 주로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거래된다. 원유의 품질을 결정하는 API도가 낮고 유황 성분이 많다. 런던의 국제석유거래소(IPE)에서 주로 거래된다.

두바이유보다는 품질이 뛰어나 보통 배럴당 3~4달러 정도 비싸다. 가격은 WTI보다 2시간 정도 늦게, 두바이유보다는 하루 정도 빠르게 결정된다.

두바이유는 중동의 아랍에미리트에서 생산되는 원유다. 중동 지역을 대표하는 원유라는 의미로 중동산 두바이유로 불린다. 두바이유는 중동권과 싱가포르에서 현물로 거래되는 것이 특징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중동 국가 원유 가격 역시 두바이유 가격에 따라 움직인다. 한국은 원유의 80% 정도를 중동지역에서 수입한다. 따라서 두바이유의 가격이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크다. 특히 중동지역은 정치·외교·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분쟁이 많아 국제유가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