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이순신에게서 배우다
"죽으려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두려움을 자신감으로 바꾼
용기의 리더십 전형
방향을 제시하는 전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 헤쳐나가
"죽으려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두려움을 자신감으로 바꾼
용기의 리더십 전형
방향을 제시하는 전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 헤쳐나가
![[Cover Story] 용기·소통, 그리고 비전…재조명 되는 '이순신 리더십'](https://img.hankyung.com/photo/201408/AA.9024580.1.jpg)
용기…두려움을 자신감으로
용기는 이순신 리더십의 핵심이다. 그가 난중일기에 남긴 ‘죽으려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은 ‘용기’라는 리더십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용기는 백배, 천배로 커질 것이다’는 그의 영화 속 말은 두려움과 용기가 종이의 앞뒷장임을 함의한다.
두려움도 배짱으로 맞서면 용기가 되고, 용기도 순간 불안이 엄습하면 두려움으로 돌변한다는 뜻이다. ‘용기의 리더십’ 전형으로 꼽히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용기는 모든 미덕 중 가장 중요하며, 용기가 없으면 다른 미덕들도 함께 의미를 잃는다고 했다.
기업이든, 조직이든 기가 꺾이면 생산성이나 효율이 떨어진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용기가 없는 자는 세상을 마주하지 못한다. 세상은 회피하고 도망치는 자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마크 트웨인은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을 다스리고 이겨내는 것이라고 했다. ‘희미한 거울’이라는 미래는 언제나 불투명하다. 그러니 두려움과 용기가 수시로 교차한다. 이순신의 말처럼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것’은 세상을 피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펼치는 것이다.
![[Cover Story] 용기·소통, 그리고 비전…재조명 되는 '이순신 리더십'](https://img.hankyung.com/photo/201408/AA.9026037.1.jpg)
신뢰도 이순신 리더십의 핵심이다. 이순신은 부하들을 믿고 맡겼다. 또한 전문성을 인정했다. 거북선을 만들 때는 배에 미친 과학자 나대용에게 거의 전권을 줬다. 신뢰는 상호적인 것이다. 믿어주면, 믿음을 받는 쪽에서 다시 믿어주는 자를 믿어준다. 그러니 신뢰는 일종의 선순환이다. 신뢰는 소통을 통해 쌓인다. 신뢰의 출발은 믿음이고, 믿음의 바탕은 ‘앎’이다. 상대를 알아야 믿음이, 신뢰가 생긴다. 그는 주변 인물들과 늘 의견을 나눴고, 그런 그의 주변엔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군율엔 엄격했다.
부하들도 때론 가혹하게 다뤘다. 원칙이 지켜져야 신뢰가 두터워진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작가 새뮤얼 스마일스는 ‘훌륭하고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가장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했다.
<논어> 안연편에는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라는 말이 나온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뜻이다. 신뢰는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깊어지는 법이다. ‘나는 조선의 장수다. 장수는 전장에 나가야 하고 나가면 이겨야 한다’는 그의 말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해준다. ‘충(忠)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싸움의 명분이 무엇인지를 꿰뚫은 말이다. 명분이 바르고 방향이 옳아야 추종자들이 생기는 법이다.
전략…방향을 제시하는 ‘비전’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은 불과 12척으로 330척의 왜함과 싸워 이긴다. 영화에서 역사적 사실이 다소 부풀려진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맹자>에 나오는 중과부적(衆寡不適)의 싸움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순신은 이런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러니 ‘역사를 바꾼 위대한 싸움’이라는 영화 포스터 문구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게임이 안 되는 싸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서 다윗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전략 덕이다.
전략은 일종의 비전이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큰 설계도를 마련해야 한다. 국가의 지도자는 나라가 나아갈 올바른 청사진을 국민에게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
전략은 통찰과 앎에서 나온다. 이순신은 바닷물의 흐름을 알았고, 사람을 어떻게 써야 할지도 알았다. 그는 물결의 흐름을 알기 위해 수없이 바다를 살피고 또 살폈다. 리더십은 현장에서 나옴을 함의하는 대목이다. 영화 ‘명량’이 연일 흥행 기록을 경신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는 대한민국에 진정한 리더십이 부족하고, 국민이 이를 갈망한다는 반증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 이순신은 누구인가
문무 겸비한 영웅…한국사 위대한 표상
![[Cover Story] 용기·소통, 그리고 비전…재조명 되는 '이순신 리더십'](https://img.hankyung.com/photo/201408/AA.9033705.1.jpg)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이순신은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에서 어린 시절의 상당 부분을 지냈다. 현충사가 아산에 세워진 이유다.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꾸준히 문과 응시도 준비했다. 난중일기를 비롯해 여러 시편을 남긴 것도 그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 덕이다. 그는 혼인 1년 뒤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첫 임지와 직책은 함경도 동구비보(지금의 함경도 삼수)의 권관(權管·종 9품)이었다. 1579년(선조 12년) 2월 서울로 올라와 훈련원 봉사(奉事·종 8품)로 배속되었다. 하지만 병조정랑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이순신은 반대했고, 이른바 ‘괘씸죄’로 8개월 만에 좌천되었다.
이순신은 옥포해전부터 노량해전까지 20여회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의 승전들은 패색이 짙은 전황을 결정적으로 뒤바꿨다. 왜란이 일어난 1년 뒤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공격과 방어, 집중과 분산의 작전을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1597년(선조 30년) 1월. 이순신에게 최악의 고난이 닥쳤다. 왜군을 공격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백의종군으로 풀려났다. 거대한 전란과 그 전란의 중심에 있던 인물의 생애는 동시에 끝났다. 1598년(선조 31년) 11월19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왜란도 종결됐다.
김하영 인턴기자 ha2young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