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독일에서 배운다
‘미래를 알려면 과거를 배우라’는 말이 있다. 역사는 과거를 공부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과거에서 현재나 미래를 살아가는 지혜를 익힌다. 독일은 분단 40년 만에 다시 하나가 됐지만 한반도는 70년 가까이 분단된 국가로 남아 있다. 그러니 독일의 통일과정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독일의 분단과 통일 과정, 통일 이후의 달라진 위상 등을 살펴보는 것이 나름 의미가 있는 이유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준비가 잘된 통일을 의미한다. 독일은 준비가 잘된 통일을 했기에 ‘통일대박’을 이룬 것이다.

[Cover Story] 40년 만에  하나된 독일…글로벌 강국 급부상
#분단의 상징 ‘베를린장벽’

1945년 5월8일. 나치 독일이 미국 영국이 주축이 된 연합군에 항복했다. 그에 앞서 미국 영국 소련(러시아)은 얄타회담을 열고 전후 독일의 처리 방법을 결정했다. 여기에 프랑스까지 가세해 4개국이 독일을 분할 점령해 최고통치권을 이어받았다. 동독 내에 있던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 점거했다. 분할 독일에 대한 처리 방침은 그해 8월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수뇌회담에서 발표된 ‘포츠담선언’으로 한층 구체화됐다. 포츠담선언은 독일이 당분간 중앙정부를 두지 않는 반면 정치·경제적 통일성은 유지하기로 명문화했다. 하지만 비(非)나치화, 즉 민주화에 대해서는 4개국의 입장이 각각 달랐다. 이에 따라 각국의 점령지역에서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군정이 실시됐다. 이런 상황에서 1946년 12월 미국과 영국의 점령지구가 경제적 통합을 이룸으로써 동서 분열의 빌미가 됐다. 이후 독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수차례 회담이 열렸으나 미국과 소련 측의 의견대립으로 실마리를 풀지 못했다. 1948년엔 소련이 독일관리이사회에서 탈퇴하면서 4개국간 협의 기능도 사실상 정지됐다. 동·서독의 분단이 고착화되자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오는 사람이 크게 늘어 났고, 동독정부는 이를 막기위한 궁여지책으로 동서 베를린 사이에 40여㎞의 길고도 두꺼운 콘크리트 담장을 쌓았다. 이것이 동·서독 분단, 미국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을 상징하는 장벽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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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헬무트 콜이 통일 주역

독일 통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2명의 지도자는 ‘동방정책’의 빌리 브란트, ‘10단계 통일방안’을 발표한 헬무트 콜 전 서독 총리다. 이 두명의 지도자가 오랜 기간에 걸쳐 통일 준비를 해왔고, 통일 후에도 체제가 달랐단 동·서독을 잘 조화해 오늘날 통일독일을 일궈냈다. 브란트는 1969년 총리에 취임하자 소련 이외 동독 승인국과 외교 관계를 맺지 않는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했다.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와 연이어 국교를 회복하는 등 동서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있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도 꿇었다.

1982년부터 16년간 서독 총리를 지낸 콜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1989년 11월28일 의회에서 10단계 통일 방안을 발표했다. 이어 그해 12월19일, 당시 폐허였던 드레스덴 성모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독일통일을 천명했다. 당시 독일에선 한 달 전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지만 어느 정치인도 통일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독일은 패전국이었고, 승전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동의가 있어야 통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콜은 드레스덴 연설에서 이런 한계를 뛰어넘었다. 그는 독일 통일이 무엇보다 유럽 평화와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호소했다. 그는 스스로가 전후에 절대로 전쟁이 없겠다고 맹세한 그 젊은 세대에 속한다며 통일독일에서 평화가 시작되도록 하겠다고 수차 강조했다. 그는 이 연설이 있은 지 10개월 후에 통일을 이뤄냈고, 통일 독일의 초대 총리가 됐다.

#‘통일=대박’ 입증한 독일

브란트·콜 총리는 독일 통일의 ‘내부 주역’이지만 외부의 공헌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다. 그가 주도한 개혁·개방 정책은 동·서독이 다시 하나가 되는 원군이었다. 헝가리의 국경선 철책이 무너지고,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물밀듯이 밀려온 이른바 ‘게르만엑서더스’의 물꼬를 터준 데는 그의 역할이 컸다. 독일 내부에서도 통일을 보는 시각이 엇갈렸다. 이질적인 체제가 합쳐지면 사회혼란이 극심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고, 서독인들의 부담이 너무 클 것이라는 분석도 많았다.

하지만 다소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독일은 통일이 바로 대박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글로벌 제조업 강국으로 부상했고, 세계 4위 경제강국이라는 위상도 과시하고 있다. 독일이 통일되면서 유럽의 정치지형 역시 더 평화로워졌다. 통일독일이 평화의 시작이 되겠다고 한 콜 전 총리의 선언이 들어맞은 셈이다.

드레스덴 선언 살펴보니

낮은 수준 교류 확대는 전제없이 곧바로 추진…
국제협력 필요한 사업은 북한 비핵화 연계해 처리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독일 통일의 상징 도시인 드레스덴에서 ‘한반도 평화통일 구상’(일명 드레스덴 선언)을 밝혔다. 낮은 수준의 교류 확대는 정치적 목적이나 전제 없이 곧바로 추진하되, 북한 인프라 개발 등 국제협력이 필요한 사업은 비핵화에 대한 북한 측의 입장 변화를 봐가면서 단계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박 대통령은 이런 원칙하에 ‘평화통일 기반구축을 위한 3대 제안’을 북한 측에 제시했다. 무엇보다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한 주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인도적 문제부터 해결하자는 것이다. 유엔과 함께 북한의 산모와 유아에게 영양과 보건도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남북한 공동인프라 구축도 크게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복합농촌단지 조성(북한판 새마을운동)을 지원하고, 교통 통신 등 인프라 건설투자와 지하자원 개발도 적극 돕겠다는 것이다. 북한 경제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동북아개발은행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역사연구, 문화예술, 스포츠 교류 등 순수 민간 접촉도 꾸준히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우리 측의 경제운용 및 경제특구 개발 경험, 금융 및 조세 관리 등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지원도 포함됐다. 북한 측에 남북교류협력사무소도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박대통령은 특히 북한의 비핵화가 전제되면 북한에 필요한 국제금융기구 가입이나 국제 투자 유치에 우리가 나서 적극 지원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이 조속히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북한이 이에 긍정적으로 호응할 가능성이 일단은 낮다는 시각이 많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