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60주년을 되새기며…
1950년 6월25일 6·25전쟁이 왜 발발했는지, 어떤 성격을 띠었는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거의 다 밝혀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6·25전쟁’에 대한 소련(현재 러시아)과 미국 측 기밀문서들이 하나 둘 공개된 덕이다. ‘6·25전쟁은 남한이 일으켰다’거나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온갖 억측과 해석, 이론도 전쟁 기밀문서가 보여주는 엄연한 ‘증거’ 앞에 무력해지고 만 것이다. 하지만 전쟁 피해국인 한국에선 아직도 남한의 북침설이나 미국의 전쟁유도설(수정주의)을 믿는 좌파인사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일부 역사학자들은 여전히 이런 좌파적 시각으로 6·25전쟁을 보는 역사책을 쓰거나 진보적 지식인양 행동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교과서로 현대사를 배우는 학생들이다. 히틀러 휘하에서 선전선동을 담당했던 괴벨스가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 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고 말했듯이 학생들이 거짓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른다.
#소련이 승인한 북한 남침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수정주의 역사관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대표적인 수정주의 계열의 학자였다. 그는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유도설에 무게중심을 두고 전쟁을 해석했다. 북한이 남침했다고 보는 전통주의 사관과 정반대다. 역사 서술과 관련한 수정주의는 1960년대 시작된 미국 사학계의 학문적 경향 중 하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미국·소련 냉전의 원인에 대해 소련의 세계 혁명전략 때문이라는 것이 당시 기존 학설이었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냉전의 원인을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에서 찾았고 결국 수정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이 같은 논리는 6·25전쟁에도 적용됐고 국내 좌파 및 종북세력, 심지어 민주화 운동권 세력들에게 그대로 전수됐다. 특히 반미를 주장했던 운동권에서 커밍스 교수의 주장은 교본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1993년 이들의 주장은 일거에 허망의 늪으로 빠졌다. 6·25전쟁 발발 직전 북한군에게 남침명령을 하달한 소련 스탈린의 공격명령서가 공개된 때문이다.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이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해 전면전 재가를 요청한 것은 1949년 3월7일로 돼 있다. 이후 8월과 9월 북한은 박헌영 외무상 등을 보내 재차 침공 허가를 요청했다. 1950년 김일성은 재차 소련을 방문, 1950년 4월 한 달간 소련에 머물려 스탈린과 전쟁계획을 논의한 것으로 돼 있다.
#애초부터 국제전이었다
수정주의자들은 6·25전쟁을 북한의 혁명세력과 남한의 친일세력 간 내전 혹은 해방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스탈린이 전면전을 승인한 소련의 비밀문서를 분석해보면 6·25전쟁은 소련-중공(지금의 중국)-북한이라는 수직적 공산주의 국가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남한을 공산화하려는 국제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련은 한반도의 전쟁을 기정사실화 한 다음 중공의 참전을 요구할 계획이었고 실제로 참전은 이뤄졌다. 소련이 6·25전쟁을 혁명세력과 친일세력 간 내전으로 규정하기보다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화에 이은 남한의 공산화를 겨냥한 국제 공산주의 전쟁이었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반면 당시 남한은 미국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그은 미국 방어선에서 제외돼 있었다. 심지어 애치슨 장관은 한국에 있던 탱크와 항공기조차 한국에 두지 않아 무방비 상태였다. 미국은 방어망에서 한국을 빼되 북한이 침공하면 미국이 지원한다는 계획이었고 결국 유엔 결의를 통해 공산주의 대 자유민주주의의 간 국제전은 더 확실해졌다.
북한의 혁명세력 대 남한의 친일세력 간 내전이라는 해석에도 문제가 많다. 김일성은 항일무장 투쟁을 벌인 인물이 아니었고, 소련의 꼭두각시였다는 게 정설이다. 김일성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친일인사들을 적극 활용했다. 반면 남한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해 친일세력과 거리가 멀었다. 비록 식민지 교육을 받은 인력을 기용하긴 했으나 당시 쓸 만한 인력은 그들밖에 없었다는 게 우파역사학자들의 분석이다. 6·25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오히려 기존 세력들이 몰락하고 새로운 세력과 계층이 등장하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겪었다.
#좌파교과서의 6·25 왜곡
6·25전쟁이 기본적으로 공산주의 대 자유민주주의 대립임에도 불구하고 좌파 교과서들은 내부 모순이 폭발해 일어난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대표적인 교과서 표현으로는 천재교육 교과서 85쪽을 들 수 있다. 거기에는 “전쟁은 남과 북 사이에서 시작되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뒤이어 중국이 개입하였으며, 소련도 북한을 군사적으로 지원하였다”라고 기술돼 있다.
소련의 비밀 문건의 내용을 교묘히 왜곡해 순전히 내전인 것처럼 그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미래엔 81쪽에는 “6·25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사이에 전개된 냉전이 열전으로 폭발한 것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이것도 우스운 표현이다. 냉전은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립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라는 정치체제로 표현하는 것이 맞다. 냉전 폭발이 아니라 일방적인 공산화 전쟁이었다는 점을 외면한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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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피해 200여만명…남한 산업시설 40% 파괴
6·25전쟁 상처 얼마나?
‘6·25전쟁’은 공산주의 국제세력의 공세로부터 자유를 지켜낸 전쟁이었지만 남·북한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정부가 발표한 공식 자료에 따르면 남한 측 군인의 사망, 부상, 행방불명 피해자는 98만7000명에 달한다. 유엔군 피해자는 한국보다 적지만 15만1500명이나 목숨을 잃고, 부상을 입거나, 실종됐다. 민간인 피해도 이에 못지 않게 많았다. 사망, 부상, 행방불명을 포함해 80만4600명이 피해를 입었다. 북한 피해도 컸다.
북한군인 사망, 부상, 행방불명 숫자는 92만6000명에 달하며 민간인은 20만200명으로 집계됐다. 남북한 인명 피해는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학살도 자행됐다. 북한군은 대전교도소에서 6000명, 전주교도소에서 1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또 전쟁 기간에 8만명 이상을 북한으로 납치해 가기도 했다. 남한의 경찰과 군도 좌익 남로당에 가입했거나 동조한 사람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거창 등지에서 양민을 죽이기도 했다.
물적 피해도 컸다. 남한의 경우 금속 기계 화학 섬유 식품 등 제조업 시설의 40%가 파괴됐다. 주택 도로 철도 교량 등 사회간접자본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제공권을 미국에 빼앗긴 북한은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사회 경제적 기반이 파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