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다시 맞붙은 '고전학파 vs 케인시안'
정반합(正反合)은 철학용어이면서 논리 전개 방식의 하나다. 정작 헤겔 본인은 사용한 적이 없지만 그의 변증법을 도식화한 것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 기본구도는 정(正·테제)이 상반되는 반(反·안티테제)과의 갈등으로 정·반을 융합·극복한 합(合·진테제)으로 초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합은 다시 정이 되고 역시 반과 갈등을 빚는 반복적 구조가 계속된다.

어떤 이론이나 논리도 완벽할 순 없다.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시대에 따라, 경제 상황에 따라 수많은 논리들이 서로 갈등을 빚고 파열음을 낸다. 자율과 규제, 긴축과 성장, 감세와 증세, 작은 정부와 큰 정부, 금리, 부채 등은 수시로 이견이 표출되는 대표적 논쟁거리다. 고전파 경제학의 시조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가 1776년 발간한 <국부론(國富論)>은 시장경제에 ‘보이지 않는 손’, 즉 자율이라는 개념을 심었다. 200년이 훌쩍 넘은 현재에도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경제의 핵심이다.

하지만 경제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경제의 만능이 아님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1930년대 대공황은 시장을 전적으로 자율에만 맡기기에는 적지않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경기침체를 벗어나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이른바 ‘케인스주의’가 주목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의 이기적 습성’을 보는 시각도 엇갈린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변되는 고전학파는 인간의 이기심이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순기능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케인스학파는 개인의 사리사욕보다는 공익을 위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고전학파의 경제학 모형은 ‘가격의 신축성’을 전제로 하지만 담합, 내부자거래는 이런 모형에 한계점이 있음을 보여주는 게 현실이다.

한동안 주춤했던 ‘경제학 논쟁’이 다시 뜨겁다. 자율을 중시한 대처리즘 신봉자이자 작은 정부 옹호론자인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강연에서 “기존의 자유방임주의를 뒤엎은 케인스주의는 미래 세대에 무관심한 이론”이라고 주장하며 논쟁에 불을 지폈다. 특히 그는 “케인스주의는 동성애의 산물”이라는 독설로 파문을 일으켰다. 국가부채를 둘러싼 논란도 거세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를 주축으로 한 성장파는 국가가 빚을 늘리더라도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키우고,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가 중심이 된 긴축파는 국가부채는 성장의 적이라고 반박한다. 경제든, 정치든 이론이란 것은 정반합의 논리처럼 양자가 부딪치면서 새로운 해법을 찾는 경우가 많다. 4, 5면에서 경제학의 변천사와 경제논쟁의 쟁점을 상세히 살펴보자.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