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동의보감은 中·日도 감탄한 '천하의 보물'
동의보감은 우리나라 전통의학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시킨 동아시아 과학사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의서다. 1995년 방한한 장쩌민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 “17세기에 편찬된 동의보감은 한·중 양국 문화교류의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언급한 것은 동의보감의 가치가 한의학의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는 중국에서도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유네스코가 동의보감을 2009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것도 이런 가치를 인정한 때문이다. 동의보감은 ‘단순히 옛 책이 아니라 오늘의 임상현장에서도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는’(경희대 한의학과 김남일 교수), 400년이란 시공을 초월한 필독 스테디셀러인 셈이다.

#中사신도 챙겨간'최고 醫書'


동의보감은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의 아픔속에서 쓰여지기 시작했다. 참혹한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치료시기를 놓쳐 고통받고 죽어가는 백성들이 늘어날 때 선조가 허준에게 의학서 편찬을 명한 것이다. 1596년 선조 임금은 기존 의학서를 집대성한 책을 펴낼 것을 지시하면서 실용적인 처방, 알기 쉬운 처방, 구하기 쉬운 약재 등을 강조한다. 아울러 치료와 함께 약을 쓰지 않고도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방법도 연구해 보라고 당부한다. 동의보감에는 이런 선조의 당부와 생각이 고스란이 담겨있다. 한마디로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의학서인 것이다. 동의보감에는 누구나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가 소개돼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약재 637종의 효용을 한글로 상세히 적어놓은 것이다. 어려운 용어로만 채워진 오늘날의 의학현실과 비교된다. 애민(愛民)과 실용이라는 동의보감의 기본 철학이 읽혀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여곡절 끝에 1613년 내의원 목활자본으로 25권 25책으로 간행된 동의보감은 발간 직후부터 ‘베스트셀러’였다. 콧대 높은 중국의 사신들도 조선에 오면 으레 동의보감을 챙겨갔다고 하니 동의보감이 당시 동아시아 전통의학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KAIST에서 과학사를 가르치는 신동원 교수는 “동아시아 과학사에서 동의보감의 위치는 최고봉”이라고 말한다. 최고 수준의 의학지식을 가려 뽑았을 뿐 아니라 일일이 출전 근거를 밝혀 당시로서는 비교 상대가 없었다는 것이다.

#신체·자연관이 고스란히…


동의보감은 단순히 약재의 효용 설명과 처방에만 그치지 않는다. 동의보감의 가치가 더 빛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4권으로 구성된 ‘내경편’에선 사람의 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우주의 형성·움직임과 연결지어 설명한다. 인간과 자연을 둘이 아닌 하나로 보고, 건강의 근원도 자연에서 찾으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또한 건강하게 장수하려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라는 양생관을 제시한다. 고전평론가 고미숙 씨(고려대 국문학 박사)는 동의보감은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회통(三敎會通)’에 기반한 비전 탐구서라고 정의한다. 또 허준이 ‘한의술’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그가 명의이기보다 동의보감이라는 대작을 남긴 학자인 영향이 더 크다고 설명한다.

동의보감은 유교 불교 도교 중 철학적 기반은 도교에 가장 가깝다. 동의보감은 인체의 내부를 구성하는 생리적 요소로 정(精) 기(氣) 신(神)을 제시하는데, 이는 도교에서 쓰는 전문 용어다. 정은 생명의 원천, 기는 원천을 작동시키는 에너지, 신은 에너지에 방향을 주는 정신활동을 말한다. 정·기·신이 균형을 맞춰 원활히 순환하는 것이 바로 건강인 것이다. 원천적으로 타고난 기를 회복하는 것이 핵심인 양생술의 관점으로 보면 질병의 원천은 탐진치(貪瞋癡)다. 탐욕은 정을 소모시키고, 진심(분노)은 기의 흐름을 흐트러뜨리고, 치심(어리석음)은 신을 어지럽힌다는 얘기다. 바꿔 말하면 정신의 불균형은 육체의 불균형을 낳는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은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병이 예방되고 치유됨을 곳곳에서 시사한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가 주목

동의보감은 1613년 출간 직후부터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일본은 1724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막부 차원에서 일본판 동의보감을 펴냈다. ‘의학의 표준을 얻으려 한다’는 게 편찬 목적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보다 42년 늦은 1766년 중국판 동의보감을 편찬했다. ‘천하의 보물을 마땅히 천하와 더불어 하고자 한다’는 게 편찬 목적이었다.

이후 중국에서는 30여종의 다양한 동의보감 판본이 나왔다. 일본과 중국인들 스스로도 동의보감을 ‘의학의 표준’, ‘천하의 보물’로 평가한 것이다.

동의보감의 영향력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쳐가고 있다. 허준은 당시 중국 한의학의 두 갈래인 남의(南醫)와 북의(北醫)에 견줄 만한 한 축으로 동의(東醫)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동의’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한마디로 동의가 남의, 북의에 판정승을 거뒀다는 의미다. 동의보감을 영어로 옮기는 작업도 거의 마무리 단계다. 또한 허준의 ‘고전’ 동의보감에 현대 한의학자들이 새로운 지식이나 임상을 추가한 ‘신동의보감’ 편찬도 속력을 내고 있다. 동의보감이 400년이란 시공을 초월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을 내고 있는 것이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 논술 포인트 >

동의보감이 쓰여진 역사적 배경, 기본적 내용 등을 공부해 보자. 동의보감에 담긴 인체관과 우주관은 상호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토론해보자. 도교와 동의보감의 연관성도 논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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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명의' 허준…의술로 신분 한계를 넘다

[Cover Story] 동의보감은 中·日도 감탄한 '천하의 보물'
허준(許逡·1539~1615)은 드라마와 소설 속에서 신묘한 의술로 박애를 실천한 의성(醫聖)으로 묘사된다. 신분을 극복하고 의관으로 최고의 벼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에서 허준의 이름을 찾기란 그리 흔하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허준의 모습은 대부분 드라마와 소설의 상상력이다.

허준은 양반 가문의 서자 출신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무관 출신이다. 내의원에 들어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등장하기까지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선조 때 유학자 유희춘의 문집이 유일하다. 얼굴에 생긴 종기를 완치해 유희춘의 신임을 얻었고, 그 덕에 이조판서에게 천거돼 종4품 내의원 침정 자리에 오른다. 선조는 종1품 숭록대부 벼슬을 내리는 등 의과도 통하지 않고 서자 출신인 허준은 파격적 승진을 거듭한다. 특히 1590년 광해군의 두창(천연두)을 치료하면서 남다른 의술을 인정받는다.

임진왜란으로 큰 혼란을 겪다 강화회담 진행으로 잠시 한숨을 돌리던 1596년 인조는 허준을 불러 의학서적을 만들도록 지시한다. 하지만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망령되어 약을 써서 선조를 죽였다’는 죄명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귀양살이는 1년8개월이나 지속됐고, 이 시련의 시기를 그는 ‘동의보감’ 편찬에 바쳤다.

광해군은 1609년 사간원의 극심한 반대에도 당시 일흔 살인 허준을 내의원에 복귀시켜 자신의 병을 돌보게 했다. 한양에 돌아온 그는 완성된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쳤고, 1615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뒤 정1품 보국숭록대부 작위가 추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