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신자유주의 선구자 빌헬름 뢰프케
1930년대와 1940년대 고전적 자유주의는 이념전쟁에서 완패했다. 독일의 민족사회주의(나치즘), 미국 루스벨트의 뉴딜, 소련의 공산주의 등 집단주의가 시대를 지배했다. 자유주의 패배의 이유가 무엇인가. 자유주의 이념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정책 때문인가. 당시 이 주제는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쟁점이었다.
결정적인 패배 이유가 고전적 자유주의 자체에 내재된 결함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다. 23세의 어린 나이로 경제학 교수가 된 빌헬름 뢰프케다. 그는 19세기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봉건시대의 억압적인 신분 사회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켜 삶과 기회를 개선하는 등 인류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고전적 자유주의가 사람들이 견뎌내기 어려운 심각한 문제도 야기했다고 뢰프케는 비판한다. 19세기 중반 이후 담합과 독점 형태의 사적 권력으로 자유가 유린된 것, 빈부 격차가 커지고 빈곤과 무산자가 증가했던 것, 인구 밀집으로 도시 주거환경이 열악해진 것 등 자본주의가 이런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념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자본주의의 그 같은 ‘병든’ 사회구조 때문이라고 질타했다.
그렇다고 뢰프케가 집단주의를 찬양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독일 하노버의 한 평화로운 작은 마을에서 의사 아들로 태어나 성장한 그는 전쟁에 참가해 집단주의의 참혹함을 뼈저리게 체험했던 터였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미제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그는 집단주의의 승리를 이성에 대한 폭동이자, 자유로운 열린 사회에 대한 철학적·도덕적 위협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뢰프케는 고전적 자유주의는 혁신적인 수정이 필요하다고 믿고 그 대안으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를 제안했다. 이 사상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이고 이를 가장 잘 지켜주는 것이 시장경제라고 믿었다. 이 체제만이 인간의 삶의 의욕과 책임감을 강화하고 경제적 번영을 보장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책임감 있는 사회적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자유방임처럼 자유와 재산권을 보호하는 데만 치중하는 대신에 국가가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뢰프케는 정부가 담합을 막고 시장지배적인 거대 기업의 성장을 억제해 자유경쟁을 확립해야 할 과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도움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자유를 침해하는 사적 권력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에도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는 정부의 그 같은 과제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국가의 지원이나 보호가 없고 시장 진입이 자유로운 경우 담합은 스스로 해체되기 마련이라는 이론적·역사적 사실을 무시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대기업이나 경제력 집중을 문제시한 것도 적절치 않다는 의견도 있다. 아무리 큰 기업이라고 해도 경쟁체제 속에서는 한순간에 몰락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독점력을 남용하는 기업이 있다면 그것은 경쟁 과정에서 도태되기 마련이다. 대기업 규제는 자유경쟁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값싸고 질 좋은 상품 공급을 의미하는 ‘경쟁적인’ 기업 활동의 발목을 잡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뢰프케는 19세기 산업자본주의가 노동자 삶의 수준과 조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점을 들어 국가는 사회적 안전망을 설치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시민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 그 같은 장치를 강력히 요구하는 경우 정부는 이를 외면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복지정책은 ‘친시장적’이어야 한다는 점도 빼놓지 않았다. 따라서 가격규제나 보조금, 일자리 보호, 무상의료, 무상급식 등과 같은 정책은 반시장적이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 시장을 가장 적게 왜곡하는, 그래서 엄격한 선택적 복지여야 한다는 얘기다.
불황의 원인이 통화신용팽창을 통한 생산구조의 왜곡에서 비롯된다는 뢰프케의 사상은 돋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불황기의 국가 역할이다. 잘못된 투자나 고용을 바로잡아 경제가 원상회복하는 과정의 불황기에서는 국가가 할 일이 없지만 자금경색으로 경제가 악순환에 빠져 불황이 점차 깊어가는 긴급한 상황에서는 경기의 초기 점화를 위해 정부의 일회적 지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19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노동대중의 각박한 삶을 자본주의 탓으로 돌린 뢰프케의 역사관은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노동자의 삶의 수준이 꾸준히 향상됐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시장경제였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실질노임도 증가했고 생활필수품 공급도 대폭 증가해 식품가격이 하락했다. 농업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실업자는 제조업 노동자로 생계를 꾸려가는 게 가능해졌다는 것이 비판의 논거다.
뢰프케의 신자유주의는 집단주의와 타협의 산물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강조하는 그의 사상은 전후 독일 경제개혁의 이념적 기초가 됐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두려움에 싸여 있던 독일과 유럽사회에 시장경제가 뿌리를 내리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경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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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프케 사상의 힘 나치 이후 독일 경제개혁 기틀 마련
뢰프케는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 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집단주의와 싸웠다. 나치즘이 도덕적 타락과 파괴를 부를 뿐이라고 맞서다가 나치 정부로부터 교수직을 박탈당했고 터키로 망명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뢰프케는 비판의 화살을 당시 지배했던 대중민주주의에 겨누었다. 사회의 궁극적인 규범과 원칙을 무시하면서 모든 것을 다수결에 맡기는 천박한 이념은 히틀러를 불러들였고 복지국가를 평등사회를 위한 혁명의 도구로 만든다고 경고했다.
뢰프케는 1938년 8월 세상이 암울한 시기에 프랑스의 자유주의 철학자 루이 루지에의 주도로 파리에서 개최한 ‘월터 리프먼 콜로키움’에 하이에크, 미제스, 레이몽 아롱, 칼 포퍼, 월터 리프먼 등 26명의 석학들과 함께 참석해 자유주의 수호를 결의했다.
5일 동안 계속된 그 모임에서 다룬 주요쟁점은 이념전쟁에서 자유주의가 패배한 이유였다. 하이에크와 미제스 등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자유주의 자체에 잘못이 있기 때문에 패배했고 그래서 자유주의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흥미롭게도 인류가 나아갈 길은 뢰프케의 신자유주의라는 의견이 지배했다.
뢰프케는 직접 하이에크를 도와 1947년 자유주의 석학들의 모임인 몽펠르랭 소사이어티를 창립했다. 이 학회의 이념적 성향은 고전적 자유주의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뢰프케는 그 학회와 손잡고 집단주의를 물리치고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데 힘썼다.
나치 정부가 몰락한 뒤에 그는 탈규제를 비롯한 독일의 경제개혁과 통화개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뢰프케는 1950년 초 실업과 무역 적자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 정부가 케인스정책을 도입하려고 할 때 “그 정책은 성공은 고사하고 인플레이션을 가져올 뿐”이라고 맞서 결국 제도 도입을 무산시켰다.
1957년 독일이 도입한, 그리고 한국의 공정거래법에도 큰 영향을 미친 반(反)경쟁제한법도 국가 과제로서 경쟁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한 뢰프케 사상이 미친 영향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는 반경쟁제한법이 많은 부분에서 자기의 생각과 다르게 반시장적으로 전개됐음을 개탄했다.